추수는 끝났지만, 다시 푸름으로 조용히 분주한 12월 들판을 본다. 11월까지 콤바인이 그리는 그림 제목은 ‘비움’이었다. 기계는 들판의 바닥을 향해 나아갔다. 바닥에는 농부들의 발자국이 화석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유례없는 태풍에 인간사회는 초토화되었지만, 벼는 풍년이라는 선물을 농부에게 주었다. 그 이유를 서로 엉켜 하나 된 발자국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지금 사회는 진리가 죽은 사회다. 물론 그 원흉은 자신들의 헤게모니에 빠져 절대 진리조차 그들의 입맛대로 바꾸는 떼거리 정치인이다. 천지를 모르고 날뛰는 그들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식인은 변(便)을 피하듯 그들을 피하고 있다. 가면 갈수록 우리 사회에는 변을 치울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는 구린내만 진동한다.
사람의 감각 중 가장 예민한 감각은 후각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적응이 빠른 감각 또한 후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 썩는 냄새를 못 맡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때는 불처럼 일어난 적도 있었다. 그때 냄새가 너무 강해서인지 사람들은 그보다 더 썩은 냄새는 맡지 못한다. 이는 후각의 진리인 ‘베버<2013>페흐너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비록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베버와 페흐너는 다음과 같이 후각의 특징을 말했다.
“지독한 냄새를 맡고 난 후 99%의 냄새를 제거해도 1%의 냄새만 있어도 사람은 30% 정도 악취를 느낀다. 그만큼 독한 냄새를 맡게 되면 이후 조금의 냄새만 있어도 독하게 느낀다.”
필자는 한때 “나라를 나라답게, 국민과 함께 갑니다.”라는 말에 모든 감각이 열린 적이 있었다. 곧 신세계가 펼쳐지는 줄 알았다. 헌법에서조차 소외된 대안학교 학생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회 약자들이 최소한 법이 정한 정당한 대우라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말이 독인지는 몰랐다. 무감각할수록 상처는 커진다고 했다. 우리 사회의 상처가 너무 크다.
그러던 어느 날, 필자에게 감각을 되찾아 준 것이 있다. 바로 자연이다. 매일 다니는 길이지만 필자는 눈을 뜨고도 못 보는 무지에 빠져 살았다. 절기는 소설과 대설은 물론 동지까지 지났는데, 들판은 다시 푸름으로 영롱하였다. 필자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내려 푸름이 자라고 있는 들판으로 갔다. 거기에는 마늘 싹이 푸른 길을 내고 있었다. 순간 마늘이 매운 이유를 알았다. 소한과 대한을 지내려면, 그들을 오롯이 들이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마늘은 땅한테 독하게 배웠을 것이다. 독함과 매움, 삶이 같은 단어라는 것을 마늘은 푸르게 말해주었다.
마늘과의 교감을 끝내고 다시 차에 시동을 거는데, 캐럴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너무 슬프게 들렸다. 소리는 있지만 모든 것이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어느 학생의 울부짖음이 메아리 되어 들렸다.
“학교 가기 싫어요! 집에서 과제만 하라는 게, 이게 무슨 학교에요!”
2020년 캐럴과 학교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둘 다 텅텅 비었다는 것이다. 빈 캐럴은 끄면 되지만, 빈 학교는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