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금관이 발견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1년 9월의 일이다. 경주 노서리에 있던 어느 주막집 공사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한 고분에서 금관 등이 쏟아졌다. 구슬 종류만 3만 개가 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금관뿐 아니라 금제 장식구 등도 무더기로 발굴됐다. 이름도 없이 내던져진 이 고분은 이후 금관총이란 이름을 얻게 됐다.
당시 이 고분은 훼손도 많았다. 전문가에 의한 발굴이 아니라 고분의 구조나 유물의 출토상황 등도 정밀하게 진단되지 못했다. 그러나 고분에서 금관이 나오면서 금관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 신라시대 고분 발굴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신라시대 고분에서 공식적으로 발굴된 금관은 모두 5개다. 국가가 압수한 도굴된 금관 1점을 포함하면 우리나라는 모두 6점의 금관을 보유하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 고대금관 13개의 절반 가량이 신라금관이다. 신라금관의 가치가 더욱 돋보이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경주 고분에서 발굴된 신라시대 금관은 1천500년의 긴 세월을 보냈지만 여전히 금빛 찬란함을 뽐내고 있다. 뛰어난 세공기술과 화려한 장식으로 외국인까지도 그 수려함에 감탄한다.
그렇지만 신라금관에 얽힌 비밀스런 이야기들은 아직도 많이 풀리지 않고 있다. 금관을 실제로 사용했는지 혹은 장례 의식용으로 만들었는지조차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다. 금관 형태가 뜻하는 상징성도 학설이 구구하다. 금관의 기원을 두고 북방설과 고유설이 맞서고 있다. 5∼6세기에 만들어졌던 금관이 어느 시점에서 홀연히 사라진 것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경주 대릉원 금령총이 94년만에 재발굴에 들어간다고 한다. 금령총은 금관총보다 늦은 1924년에 발굴을 했으나 역시 일제 강점기 때여서 종합적이면서 정밀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발굴된 금관은 금제방울이 달려있다 하여 금령총 금관이라 한다. 다른 금관에 비해 크기가 가장 작아 왕자의 무덤일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이번 사업으로 이곳 유적에 대한 보다 상세한 정보 파악이 있을 것이라 했다. 신비에 싸인 신라의 비밀이 얼마나 더 풀릴까 궁금하다.
/우정구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