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까지 대구 봉산문화회관
기쿠치 작가는 현대미술의 역사 속에서 상실되거나 제거됐던 서사적 기억을 주목하고 자신과 우리의 애매한 기억 층 속에 이를 다시 각인시키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일본 오사카대학 예술학부 조형전공을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미술공예대학에서 미술코스 단기유학과정을 수료한 기쿠치 작가는 자연 혹은 생명, 평화, 기쁨, 치유와 그 관계에 관한 창조적 기억을 표현한 조각 작품을 선보여 왔다.
`애매한 기억`이라는 제목의 전시실에는 미륵보살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태어나기까지의 56억7천만년이라는 시간과 거리를 사유하고 시각화한 작품들이 선보인다.
그는 현세의 미륵보살을 입체로 형상화하고 그 주위 벽면에 범자(梵字)를 프린트한 긴 천을 설치해 세상과 우주 -도솔천 Tusita 兜天- 사이의 거리를 시각적으로 사유한다. 미륵은 구원의 불(佛)이며, 그 구원의 세상은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우리를 내려다보듯이 전시실의 천장 가까이 설치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머물다가 잠시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인데, 그의 애매한 미소가 진정 우리들 인간이 갖고 있는 마음의 영원한 평화와 이상의 기억이라 할 수 있다.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면 범종 소리와 함께 미륵을 뜻하는 범자가 먼저 보인다. 32개의 점이 범자 형상 위에 부조처럼 솟아있다. 이 서예 작업은 전시실 내부 4벽면을 둘러싸고 있는 23m 길이의 천에 576만개의 점을 프린트한 작업 `576 million dots`를 이루는 기본 단위로서의 글자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서면 범종소리가 울리는 자리에 실제 범종의 일부를 본떠 제작한 `소리의 오마주`가 우뚝 서 있다. 2.5m 높이에 폭이 좁은 이 작업은 나라시의 동대사절에 있는 범종과 그 소리를 채집해 이를 다시 시청각적으로 그려내는 기억이다. 위를 올려다보면, 1m 폭의 천을 종이접기 하듯 정교하게 접어서 벽면에 두 단 혹은 세단으로 설치한 `576 million dots` 작업과 이를 배경으로 벽면의 좌측 상단 높은 곳에 작은 황금색 미륵보살반가사유상 `perfume`이 설치돼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바라보는 벽면 위의 천에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글자 형상이 보일 정도로 매우 작은 글자가 프린트 돼 있고, 그 글자는 32개의 점으로 구성돼 있다. 이 설계는 이해와 접근이 불편한 이런 낯선 상태 속에서도 시간을 두고 천천히 들여다보면 시간과 거리의 규모가 재생되는 듯 현기증이 느껴지는 공간 연출이며, 대기(大氣)를 사이에 두고 영원한 평화와 기쁨과 이상이 가득해지는 공간 차원의 `애매한 기억`이다.
다른 반대편 공간의 좌측 벽면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기억하고 그리는 `Meeting`, 바람이 닿는 촉감의 기억을 상징하는 `질풍`, 둥근 얼굴의 여인을 기억하는 `여성` 등 나무작업의 기억을 떠올리는 조각들이 보인다. 그리고 가운데 벽에는 금색 `유비무환의 지팡이` 2점을 사이에 두고 얼굴 사진 2점 `많이 먹어`와 `더 먹어`가 걸려있다. 이는 미술가 홍현기의 어머니가 작가에게 베풀었던 애정에 대한 기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우측 벽면에는 나무로 만든 미륵보살의 손 10개를 겹쳐서 불확실한 기억의 사유를 표현한 `기억의 잔상`이 보이고, 그 옆으로 생명체의 근원을 기억하는 염색체를 털실과 나무로 표현한 `XY` 작업이 보인다. 또 전시장 밖, 지하와 1층 외부를 연결하는 통로 공간에는 2011년 3월 11일, 32m 지진 해일로 인한 재해와 대자연의 힘을 기억하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염원했던 애드벌룬 작업 `Requiem`을 이 곳 장소에 맞게 재현한 작업을 볼 수 있다. 2층 4전시실에서 4월 1일까지.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