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들판에 청둥오리들이 내려앉는다. 내몽골이나 시베리아 어디쯤에서 덜 추운 곳으로 월동을 하러 온 철새들이다. 충남 아산의 곡교천에 날아온 청둥오리들의 이동경로를 추적해보니, 3월 말경에 700km 거리인 중국 랴오닝성 선양으로 날아가서 약 2주일간 머문 뒤에 다시 670km를 날아서 서식지인 내몽골 힝간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봄 여름 가을을 보내고 11월 말에 다시 내몽골을 출발해서 갈 때와는 달리 중국 지린성과 압록강을 거쳐 12월 초순에 아산의 곡교천으로 돌아온 여정도 알 수가 있었다.
청둥오리는 오로지 맨몸 하나로 살아간다. 옷도 입지 않고 집도 없고 돈도 신분증도 지닌 것이 없다. 조금 덜 추운 곳에서 겨울을 나려고 수천 리 먼 하늘을 날아 여기까지 왔다. 잡식성이라 풀씨나 곤충 등을 먹이로 한다지만 그 많은 무리가 이 얼어붙은 땅에서 어떻게 먹고 사는지 놀라운 일이다. 요즘은 볏짚조차 소 먹이로 다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들판에 떨어진 이삭도 별로 없을 것인데, 맨몸으로 혹한을 견디는 것도 그렇고 더없이 열악한 생존 환경임에도 비관하고 좌절하거나 우울해 하는 기색이 없이 다들 참 씩씩해 보인다. 수십 수백 마리가 무리를 지어 다녀도 영토나 먹이를 두고 싸우는 걸 본 적도 없다.
겹겹이 옷을 껴입고 겨울 들판에 서서 청둥오리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인간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져야 더 안심이 되고 행복할 거라는 강박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경쟁과 성과를 위해 소모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 자유와 행복을 성취하게 되었는지.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안전하고 평화롭게 되었는지. 그래서 어떤 비전과 보장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인지.
이사를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군더더기가 많은지. 사람이 사는데 온갖 생활용품이며 옷가지들은 왜 그렇게 쌓이는지. 우리나라 보통 사람 하나의 의식주에 드는 물품과 비용이면 아프리카 난민 수십 명을 먹여 살리고도 남을 것이다. 더구나 그 모두가 자연을 훼손하고 생태계를 파괴한 산물이 아니던가.
삶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이라는 걸 부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행복을 싫어하고 불행해지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땀 흘려 일을 하고 치열하게 경쟁을 하는 것도 다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지만 그래서 얼마나 더 행복해 졌는가. 국민소득이 수십 배나 높아지고 편리한 문명의 이기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왜 자살자가 늘어나고 범죄는 날로 흉포해지는 것일까.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은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는 일인가.
절대빈곤을 벗어나 경제대국의 반열에 든 우리나라에서는 욕심을 버리면 이미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가 있다.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욕심과 어리석음에 눈이 멀어 상대적 박탈감 따위로 비관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슨 일에든 성실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의식주를 해결할 수가 있지만 사람이 어찌 밥으로만 살겠는가. 보다 높은 삶의 질을 위해서는 여가생활도 있어야 하고 요즘 한창 인구에 회자되는 인문학적인 콘텐츠도 필요하다. 그것 역시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돈을 들이지 않고도 최고의 음악과 문학과 미술을 향유할 수가 있는 세상이다. 언제 어디서나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 수가 있고, 고흐나 피카소의 그림도 영상으로 볼 수가 있다. 관심과 열성만 있으면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도 마음껏 누릴 수가 있다. 예술과 철학과 종교와 역사 등 어느 분야든지 최상의 지식과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길이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다. 방안에 앉아서 세상 구석구석의 풍물을 구경할 수도 있게 되었다.
우리가 이미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 그런데도 무엇을 더 가지려고 아득바득하는지를 저 겨울 들판의 청둥오리들이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