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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꾼과 가재미

등록일 2017-12-15 20:56 게재일 2017-12-1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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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희<br /><br />수필가
▲ 김순희 수필가

몇 해 전 이맘때쯤이었다. 지나가던 승용차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아가씨, 길 좀 물어봅시다. 대보파출소가 어디쯤이죠?”

차 번호판이 타지인 걸 보니 한참을 헤맨 것 같았다. 여기는 장기면인데 대보면이라면 정반대 방향이라 길을 영 잘못 들었다. 찬바람이 휘감는 쌀쌀한 날씨라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가씨`라고 불러준 말이 내 기분을 한없이 들뜨게 했다. 기분대로라면 대보파출소까지 안내해주고 싶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를 되돌려 가라고 손으로 약도까지 그려 알려준 후, 무슨 장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집에 들어가서 떠들었다. 남편은 또 장사꾼에게 속았다며 웃어넘겼다.

요즘은 동안(童顔)이 대세이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길 원하는 게 대다수 여자의 바람일 것이다. 동안의 원래 의미는 나이 든 사람의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일컫는다. 최근엔 사회적으로 `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외모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변하였다. 젊다는 말에 노여워할 사람은 없다. 한 살이라도 어려보이려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다. 화장을 하고, 변장을 서슴지 않는다. 때론 분장의 수준을 넘어 가면을 쓰기도 한다.

다음날 죽도 시장에 갔다. 장볼 것이 많다고 어머님과 손위 시누이도 함께였다. 채소 가게를 먼저 들렀다. 주인아주머니는 시금치 한 무더기를 올려놓으며 나에게 눈짓을 곁들여서

“아가씨, 덤으로 마이주께.”

한다. 이 말에 어머니는 박장대소를 했다.

“아이고, 아가 대학생이구만. 옆에 있는 이 아는 아가씨 안 같은교?”

어머님의 손길은 시누이를 향했다. 당신 딸이 장성한 아들을 둔 중년인데도 아가씨 소릴 듣기 원하셨고, 어시장 좌판에 문어와 개복치 무게를 달 때도 `젊은 아지매가 야무지네` 라는 소리에 스르르 지갑을 여셨다.

늦은 밤, 잠자리에 누워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남편에게 들려주었다. 가만히 듣더니 남편은 가재미들의 대화라며 피식 웃었다. 가재미? 장삿속에 늙은 나를 아가씨로 보는 채소 아줌마의 눈이 가재미고, 오십 넘은 딸도 아가씨로 봐 달라는 어머니 눈도 가재미처럼 돌아갔고, 장사꾼 말에 기분 좋아서 낄낄거리는 내 눈도 가재미라고 놀렸다.

남편은 옆에서 쉽게 코를 골지만 나는 잠에 빠져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잡념삼매경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나를 아가씨라 부르는 사람은 남편 말처럼 장사꾼이거나, 나보다 연배가 훨씬 높은 어른들이었다. 장사꾼이야 손님 기분을 맞추려고 거짓말을 보태는 것이고, 나이 든 어른들 눈에야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이 다 젊은이로 보일테니 그저 아가씨라고 불러줬을 것이다.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이나 서로 기분 좋자는 뜻일 게다. 그 생각이 나를 더 잠 못 들게 했다. 잠을 잘 자야 피부가 고와진다는데 말이다.

동안의 전제 조건은 젊게 보이는 피부라고 한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규칙도 많았다. 물 많이 마시기, 매일 운동하기,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기 외에 잠도 함부로 잘 수 없다고 했다. 옆으로 누우면 눌린 얼굴에 주름이 생기니 똑바른 자세로만 자야 된다. 나는 왼쪽으로 누워야 잠이 잘 오고, 물을 많이 먹은 다음 날엔 몸이 퉁퉁 부어오른다. 그러니 내가 아가씨 소릴 듣는 것은 분명 접대용이다.

얼마 후, 친정엄마가 무릎에 인공 관절을 해 넣으셨다. 중환자실에서 꼬박 한 달을 보내며 물리치료실을 오갔다. 오래 병원에 입원해 계시니 찾아오는 친척이 많았다. 이모부 내외분도 멀리에서 일부러 찾아오셨다. 병문안 오신 이모부는 아픈 엄마도 위로했지만, 옆에서 병시중 하는 나를 더 챙겼다. 오랜만에 봐서인지 아이들 안부부터 물으셨다. 둘째가 고등학생이라 했더니,

“아직도 아가씨 같은데 아가 벌써 고등학생이가?”

아가씨란 말에 옆에 있던 남편이 가재미눈을 뜨고 대답했다.

“이모부님도 장사 하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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