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 논문 주제를 미당 서정주에 관한 것으로 정하고는 시간 날 때마다 `봉산산방(蓬蒜山房)`에 가 한두 시간씩 앉았다가 온다. 햇살 속에, 바람 가운데 어떤 말씀이라도 들릴까 싶어 나무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심정으로 그러고 있다.
서정주 시인이 1970년부터 200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던 집이다. 서울 관악구 예술인마을, 내가 나온 초등학교 건너편에 있다. 어릴 적 등하교길이나 구멍가게에서 시인을 한번쯤 마주쳤을 지도 모른다. 생전 미당은 담장 너머 아이들 합창 소리 듣는 걸 좋아했다 한다.
관악산에서 사당역 방면으로 내려오는 등산객들이 가끔 들여다보는 걸 제외하면 찾는 이가 드물다. 덕분에 내 별장처럼 대나무 그늘 아래 누워 낮잠도 잔다. 그러다 문득 허공에 대고 “왜 그랬어요?” 물어본다. 물론 대답 없다. 댓잎을 흔드는 바람소리 뿐,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도 17년이나 됐다.
친일, 독재찬양, 교언영색…. 미당의 삶을 긍정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동정이든 증오든 나는 그에게 어떤 손가락질도 할 수가 없다. 나라고 해서 그처럼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감싸기엔 너무 엉망으로 살았고, 욕하기엔 시가 너무 빛나서, 나는 좋아하는 시인을 묻는 질문에 “삶과 시가 분리된 서정주”라고 대답해버리곤 한다.
친일의 대명사인 미당이 중앙고보 시절 항일 운동을 주도했다가 퇴학당한 사실은 덜 알려져 있다. 그 사건 이후 민족, 애국, 정의, 현실참여 따위에서 등을 돌려버렸다. 자기 평생이 영광보다 치욕으로 얼룩질 것을 그때 이미 알았는지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병든 수캐마냥 헐덕거리며 나는 왔다”(`자화상`)고 썼다.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하고선 정말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았다.
스스로를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여긴 듯하다. 수캐도 그러하고, `화사`의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뚱아리”도 시인의 `자화상`이다. “즘생스런 우슴은 달드라 달드라”(`입마춤`) 같은 구절은 늑대인간 류 괴수를 연상시켜 섬뜩하다. 오직 배부르고 따뜻하기 위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이 처세와 아첨, 어용이라는 방식으로 삶을 한쪽에서 끌고 갔다. 다른 한쪽엔 시에 대한 허기, 써야만 사는 불치의 병이 있었을 텐데, 역시 동물적 본능에 가깝다.
죽는 날까지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라는 궤변으로 자신을 변호한 미당을 향해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거두지 않는다. 공식적인 사과나 반성은 없었지만, 나는 그가 정말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티 안 나게 시인의 방식으로 반성한 것이 문제다.
말년에 살게 된 집 이름을 `봉산산방`이라고 지은 것에 주목해본다. `쑥 봉(蓬)`과 `마늘 산(蒜)`. 곰이 쑥과 마늘만 먹고 사람이 됐다는 단군신화에서 빌려온 것이다. “나는 짐승이니 쑥과 마늘만 먹듯 시를 쓰며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 아니었을까. 어찌 보면 은유적 회개다. 하지만 거기 살면서도 독재정권에 어용했으니 성숙한 인간으로의 전환은 끝내 이루지 못한 것 같다.
엉망진창 문제적 인간, 그러나 가장 찬란하고 아득한 시인의 집 뜰에 앉아 생전 그처럼 초등학교 아이들 합창 소리 듣는다. 석조에 핀 수련이 잠시 흔들린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허탈하고 쓸쓸한, 그런데 아름다운 오후가 간다.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두 달 동안 맥주로만 연명하다 뒤따라 간 한 인간의 지극히 인간됨, 너무나 인간적이라서 짐승에 가까웠던 한 생애를 생각한다. “내일 다시 올게요.” 수련이 한 번 더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