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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벼락처럼 바꾸는 만남

등록일 2017-06-07 02:01 게재일 2017-06-0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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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거제도 해금강 유람선에 올랐다. 오색 등산복 차림의 어머님들과 함께 `아리랑 1호` 명찰을 가슴에 달고 앉아 약장수를 방불케 하는 선장의 속사포 `구라`에 박수치며 웃었다. 사자바위, 소녀바위, 십자동굴을 보면서 탄성이 나왔다. 절해고도는 아니지만 푸른 바다 위 홀로 아름다워 외로운 해금강을 뒤로 하고 외도로 향했다.

유럽풍 건축물들과 인위적 꽃나무들이 먼저 떠올라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섬에 내리는 순간, 인위와 무위가 어우러진 절경에 감탄했다. 산책로를 오를 때마다 예쁘게 깎아놓은 정원수와 조각상, 대숲, 새소리, 분수, 꽃향기가 오감을 즐겁게 했다. 인공자연에 서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일은 묘한 감흥을 일으켰다. 외도 해상농원 설립자 고(故) 이창호씨 기념관에서 한참 동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연보를 읽으며, 내가 밟은 것이 그저 작은 섬 관광지가 아니라 한 인간의 위대한 피와 땀, 눈물이라는 사실에 벅찬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외도의 작은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이창호씨와 최호숙 여사 부부의 숨결이 닿아있다.

1969년 7월, 해금강 부근으로 낚시를 왔다가 태풍을 피해 외도에서 하룻밤 민박을 한 것이 운명의 변주가 되었다. 섬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이창호씨는 3년에 걸쳐 섬 전체를 사들인 후 황무지를 가꾸기 시작했다. 작은 선착장 하나 만드는 데도 6번이나 실패했고, 감귤나무와 방풍림, 돼지 농장을 차례로 망쳤다. 풍랑과 해일, 뙤약볕과도 싸워야 했지만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세상의 편견도 칼날 같았을 것이다.

수차례 실패 끝에 30년간 식물원으로 가꾼 것이 지금의 외도다. 90년대 초 문화시설 허가를 받고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편입된 후 2007년까지 1천만 명이 넘게 찾은 한국 대표 관광지가 됐다. 맨손으로 바위섬을 일궈 만인에게 내준 이창호씨는 2003년 세상을 떠나고, 부인 최호숙 여사가 섬을 가꿔가고 있다. 외도를 빠져나와 거제 남정리를 지나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고향이다. 곳곳에 이정표가 있어 어렵지 않게 생가를 찾았다. 마을은 여전히 들떠 있었다.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주차 안내를 하고, 생가 앞에선 `대통령님 탯줄 잘라준 추경순 할머니 아드님`께서 방문객들을 모아놓고 대통령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좁은 마당에 다 무너진 시멘트벽, 그렇게 허름한 집은 처음 봤다. 그것도 지금 사는 분들이 고쳐 쓰는 덕에 그나마 유지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살 때에는 흙벽돌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이 초라한 지붕 아래서 가난과 겸손을 배웠겠구나, 문간만 나서면 펼쳐진 산과 들, 푸른 하늘과 바다를 달리며 가슴을 키웠겠구나 생각했다. 초가지붕처럼 소박한 사람, 거제 바다처럼 정직한 변호사 문재인을 현실정치로 이끈 것은 노무현과의 만남이었다. 그도 그 만남을 `운명`이라고 칭한다. 타자와의 만남이나 우연한 사건을 통해 생애가 돌연 뒤바뀐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노무현을 만나 대통령의 길까지 걷게 된 문재인, 아들 전태일의 죽음을 통해 노동운동의 대모가 된 이소선 여사, 외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가 섬에 평생을 바친 이창호씨 모두 그러하다. 인권변호사로, 공장직공의 어머니로, 교사로 살던 평범한 삶의 궤적이 한 사람, 한 사건, 한 장소에 의해 완전히 새로워진 것이다.

마틴 부버는 “나는 너와의 만남을 통해 인생과 세계를 이해하며 삶을 비약적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껏 나를 시인으로 살게 한 숱한 만남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만 아니었으면, 하고 이가 갈리는 밤도 많으나 대체적으로 감사하는 편이다. 글 쓰고 놀고 먹는 것 같은 나도 누군가의 삶을 벼락처럼 바꾸는 사건이 될 수 있다. 맘대로 사는 듯한 내 삶도 어떤 개입에 의해 전혀 뜻밖의 것이 될지 모른다. 그 우연한 혼돈을 나는 기꺼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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