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쿠츠크에서 버스를 타고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을 달렸다. 고려인들이 화물열차에 실려 와 버려졌던 땅, 광막한 들판 너머로 지평선이 시간을 끊임없이 데려가고 있었다. 얼어붙은 땅을 맨손으로 파헤쳐 감자 심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고려인 1세대들도 저 지평선에 실려 아득한 먼 곳으로 사라졌겠지. 생각에 잠긴 사이 버스는 알혼섬에 도착했다. 포장도로와 흙길, 물길을 번갈아 가며 여섯 시간 걸렸다.
알혼섬 일대는 한민족의 시원지이자 샤머니즘이 발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바이칼 호수 유역에 정착해 살다가 몽골과 만주를 거쳐 백두산으로 내려왔다. 시인 백석이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던 것을 기억한다”(`북방에서`)고 한 것은 우리 민족 이주사(史)에 대한 선험적 원형이다.
그때 같이 오지 않고 지금껏 바이칼을 지키는 사람들이 부랴트 민족이다. 그들은 예로부터 샤먼을 의지하는데, 알혼섬 어디에나 서낭당, 솟대, 장승 등 우리 민속신앙과 똑같은 상징물들을 볼 수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지기(地氣)가 센 곳이라던가. 전 세계 무당들의 성지라고 한다.
그렇다고 부랴트 사람들이 무슨 심령술사나 영화 `곡성`에 나오는 박수무당인 것은 아니다. 우리와 머리, 피부, 눈동자 색이 같으며 알타이어계 말을 구사하는, 오래 전에 갈라진 한 핏줄이다. 친절하고 소박한 사람들, 저녁상에 우리 음식과 비슷한 돼지고기찜과 나물무침을 차려주었는데, 정말 맛있어서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옥타비오 파스가 “샤먼들은 사물에 깃들인 정령들로부터 지혜와 행동의 지침을 얻는다.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물 안의 지혜의 소식과 감정이입의 깊은 공감에 잠길 때 자신의 내부에 솟구치는 특별한 노래와 표현 이미지를 듣고 본다”고 한 말을 떠올리면, 샤머니즘을 믿는 부랴트인들은 사물의 겉모습보다 내면을 더 중시하며, 미물에도 눈과 귀를 기울이는 타자지향의 성숙한 세계 인식을 지닌 사람들이다.
나 역시 샤먼의 기질을 타고난 게 분명하다. 얼음이 녹지 않은 바이칼 호수의 칼바람도, 아찔한 벼랑을 뛰놀다 내게로 와 얼굴을 핥아대는 개들도 다 반가웠다. 내가 잃어버린 고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칭기즈칸의 유해가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신성한 불칸 바위와 알혼섬의 하늘, 3천만년을 얼고 녹은 바다 같은 호수를 보며 울었다. 벅찬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들판을 달려가다 넘어졌다. 무릎 꿇고 엎드려 바이칼 호수 물을 마셨다. 이틀 전 이르쿠츠크에서 마신 러시아산 보드카도, 군 시절 유격훈련 산악 행군 중에 들이켰던 `맛스타`도 그 청량한 맛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감동과 흥분을 주체할 수 없어 불칸 바위 벼랑에 매달려 노래도 불렀다. 결코 `아재`가 아닌데, 왠지 `광야에서`를 꼭 불러야 할 것만 같아 목청껏 질렀다.
나는 쉽게 감동하는 사람이라 알혼섬에 내 노래와 입맞춤, 영혼 몇 다발을 두고 가는 게 몹시 기뻤다. 불칸 바위에게는 메아리를, 바이칼에게는 키스를 돌려받으러 다시 올 것이라고 다짐했다. 사실 이르쿠츠크 왕복 항공권이 채 50만원도 안하는데다 네 시간밖에 안 걸리기 때문에 얼마든지 또 올 수 있지만, 바이칼은 다시 못 올 것처럼 괜히 비장하게 떠나야만 할 것 같았다. 우리 조상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숙소로 돌아와서도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이여”라는 노래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내가 불렀지만 가창력이 괜찮았기 때문이다. 3시간에 100루블인 와이파이 티켓을 사서 스마트폰을 열었더니 새 대통령이 주먹 쥔 두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험한 광야를 앞장서 걸으며 크게 보고 멀리 나아가는 지도자가 되길, 부랴트인에게 배운 대로 합장한 손을 세 번 흔들어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