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가지 않지만 소래포구는 내 친구가 연인과 자주 데이트 가는 곳이다. 거기 수인선 협궤열차는 오래 전에 사라졌고, 열차가 다니던 철길이 남아 있다. 1960년대 실향민들이 새우잡이를 하면서 만들어진 포구는 새우, 젓갈, 꽃게로 유명한 어시장이 되었다. 좌판 횟집에 앉아 바다를 보며 먹는 생선회는 그저 음식이 아닌 추억과 낭만의 다른 이름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소래 포구의/ 난전에서 본다, 벌써 귀밑이 희끗한 늙은 사람과/ 젊은 새댁이 지나간다/ 아버지는 서른여덟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지난날/ 장사를 하느라 흥해와 일광을 돌아다니며 얻은/ 병이라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소래에 오고 싶어하셨다/ 아니 소래의 두꺼운 시간과 마주한 뻘과 협궤 쪽에 기대어 산/ 새치 많던 아버지, 바닷물이 밀려나가는/ 일몰 끝에서 그이는 젊은 여자가 따르는 소주를 마신다/ 그이의 손이 은밀히 보듬는/ 그 여자의 배추 살결이/ 소래 바다에 떠밀린다/ 내 낡은 구두 뒤축을 떠받치는 협궤 너머/ 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산다.”
송재학의 시 `소래 바다는`이다. 죽은 장돌뱅이 아버지, `젊은 여자`와 새살림을 차린 아버지를 하필 소래포구에서 추억하는 것은 아버지가 소래에 오고 싶어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 대신 소래에 간 시인은 `내 낡은 구두 뒤축을 떠받치는 협궤 너머`로 젊은 여자와 사는 아버지의 환영을 본다. 아버지가 사라진 현재의 소래엔 낡은 구두를 신고 아버지의 쇠잔한 삶을 그대로 살고 있는 시인만이 서 있고, 아버지는 협궤 너머 피안의 소래에서 젊은 여자와 영원히 산다. 소래포구 난전에서 본 귀밑이 희끗한 사람은 기억 속 아버지인 동시에 시인 자신이다.
이 시를 읽은 스무 살 무렵 소래포구를 동경했다. 지하철을 타고 오이도에 내려 다시 버스로 갈아타 소래포구에 갔다. `일몰 끝에서 소주를 마시는` 시적 풍경의 실현을 위해 어시장으로 향했다. 좋게 말해 난전이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호객 행위가 도를 넘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한 좌판 횟집에서 두 마리 합쳐 500그램도 안 되는 광어회를 5만원 넘게 주고 사 먹었다. 초장과 채소 값은 별도, 매운탕도 1만원을 더 내야 먹을 수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점 먹지도 않았는데 접시가 깨끗했다. 최종 금액은 10만원이 넘었다. 결국 은행에 가 돈을 뽑아와야만 했다.
소래포구 화재 뉴스에 달린 댓글들이 심상찮다. 대구 서문시장과 여수 수산시장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 다르다. 쌤통, 인과응보, 자업자득, 통쾌 같은 단어들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그동안 바가지, 물건 바꿔치기, 저울 속이기, 과도한 호객행위, 카드 계산 거부, 비위생, 불친절 등 악덕 상술에 상처 받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 왔다가 시간과 돈 버리고 불쾌함만 안고 갔으니 불난 시장을 보며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된다. 타인의 불행을 두고 조롱하는 것은 온당치 않지만, 다수 고객의 비판과 분노를 상인들은 겸허히 받아들이고 과오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조선 거상 임상옥은 `장사는 돈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인과 손님 모두에게 적용되는 격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재래시장에서 기대하는 것은 철저한 위생과 규격, 포인트 적립이 아니다. 조금 서툴고 어설퍼도, 전문 외식업체 수준의 위생과 청결이 아니더라도, 몇 백 원 계산이 틀리더라도 정감 있는 말 한마디와 환한 웃음, 장난스러운 에누리 흥정으로 전대와 지갑 대신 사람과 사람 사이 빈틈을 채우는 마음의 거래, 바로 그것이다.
삶터를 잃어버린 소래포구 상인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빠른 피해 복구가 이뤄져 본래의 활기찬 포구를 회복하면 좋겠다. 어시장만 되살리고 악덕 상술은 사라졌으면 좋겠다. 상인들이 비양심적 얌체 영업을 할 수밖에 없던 구조적 문제가 있다면 그것도 이참에 뜯어고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