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에 손잡고 거닐던 길목도 아스라이 멀어져 간 소중했던 옛 생각을 돌이켜 그려보네/ 나래치는 가슴이 서러워 아파와 한숨지며 그려보는 그 사람을 기억하나요 지금 잠시라도/ 달의 미소를 보면서 내 너의 두 손을 잡고 두나 별들의 눈물을 보았지 고요한 세상을”
어릴 적 아버지 따라 전국 팔도로 낚시를 다녔다. 국도를 달리는 낡은 봉고차 카세트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들이 스무 해가 지나도 머릿속에서 재생이 되는데,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서유석의 `타박네`는 제목과 가수, 노랫말을 정확히 알고 있어 그동안 참 많이도 흥얼거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그저 구슬픈 멜로디만 흐르는 노래가 있었으니 바로 김연숙의 `그날`이다. 오랫동안 이 노래를 알고자 애를 썼다. 어디서도 들을 수가 없었다. 오직 아버지 봉고차에서만 듣던 노래였으나 내 사춘기의 시작을 알린 아버지의 부재와 함께 내 곁을 떠났다.
아버지는 대기업에 납품하는 가방공장 사장이었다. 중학교 마치고 상경해 남대문 밑바닥서부터 잔뼈가 굵어 솜씨가 좋았다. 몇 년 만에 가게를 내고 곧 공장을 열었다. 덕분에 나는 유복한 유년을 보냈다. 우리 집 옥상엔 아버지의 골프 연습 시설이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주말마다 낚시를 다녔고, 엄마는 평일 오전에 에어로빅을 했다.
그러나 IMF 폭풍을 피하지 못했다. 공장은 부도를 맞고, 집안 곳곳엔 차압딱지가 붙었다. 아버지는 지방을 전전하는 행상이 되어 일 년에 한 번 얼굴 보기조차 힘들었다. 엄마의 새벽 식당일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박스 줍기가 시작된 것도 그 즈음이다.
생각날 듯 나지 않는 무언가가 마음을 그토록 답답하게 하는 줄은 몰랐다. 그러다 십 수 년 만에 궁금증이 풀렸다. 동네 술집서 육회에 소주 먹다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에 돌연 굽혔던 허리를 세우고 귀를 쫑긋거렸다. 가게에 노래 제목을 물었고, 그제야 김연숙의 `그날` 임을 알게 된 것이다.
노랫말이 고우면서 아프다. 아프기 보단 아리다. 짓이긴 꽃에서 꽃물 배어나듯, 노을강의 역광 위에 작은 물고기가 일으킨 파문 하나 퍼지듯, 그렇게 고우면서 아리다.
중학교 1학년 때, 공장 부도 후 쫓기듯 가족과 떨어진 아버지가 일 년 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아버지 본다는 생각에 설레어 토요일 방과 후 성남 비행장으로 갔다. 봄날이었다. 에어쇼가 열리고 있었다. 비행기들이 일으킨 모랫바람 속에 아버지가 손을 흔들었다. 빨간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채 소시지를 굽고 있었다. 파인애플을 꼬치에 끼우고 있었다. 나는 철이 없어, 평소 좋아하던 군것질거리를 실컷 먹는다며 마냥 즐거웠다. 아버지는 환하게 웃었다.
빨간 모자 아래 그 웃음이 얼마나 애처로운 것인지 깨달았을 때 나는 어른이 돼 있었다. 머리가 굵어 아버지가 어려웠다. 살가운 말 한마디 하지 못하게 됐다. 같이 목욕탕에 갈 수 없는 나이가 돼버렸다.
20년 지난 봄날, 아들은 심장 부정맥 수술을 받았고, 아버지는 암이 될 뻔한 위 선종이 발견돼 곧 제거 수술을 받는다. 연초에는 할머니가 낙상해 고관절 골절을 입었다. 연이은 악재에 답답했는지 얼마 전 아버지는 그토록 미워했던 할아버지 묘소를 몇 해만에 찾았다. 나는 소중했던 옛 생각을 돌이켜 그려보며, 모두가 한 밥상 위에서 밥 먹던 시절을 추억한다. 그 시절은 아스라이 멀고, 아버지는 늙었다. 벚꽃 피면 시골집에 며칠 내려가 아버지 곁을 좀 지켜야겠다. `그날`을 듣는다. 1994년 어느 일요일 오후, 국도를 달리는 아버지의 봉고차. 졸린 햇살이 차창을 통과해 사다리꼴로 펼쳐지고, 떡밥 냄새와 물비린내 버무려진 차 안에 아버지가 태우는 담배 연기 가득하다. “달의 미소를 보면서 내 너의 두 손을 잡고….” 오후의 환한 빛 속을 은은하게 채우는 곱고 아린 노래, 장단을 맞추 듯 아이스박스에 담긴 붕어들이 이따금 꼬리지느러미를 푸드덕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