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러시아의 피겨스케이팅 선수 예브게니아 메드베데바가 김연아의 기록을 경신했다.
김연아가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기록한 쇼트와 프리 프로그램 합계 228.56점보다 1.15점 높은 229.71점을 받았는데 `메드베데바가 김연아를 넘어섰다`는 투의 자극적 문구들이 뉴스 기사를 장식했다. 우리나라 일부 언론들,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가 특히 극성이었다. 하긴 김연아의 점수는 절대 깨지지 않을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여겨졌으니, 신기록 탄생이 크게 놀랄 만한 일은 틀림없다. 반대편에서는 점수 인플레 영향이라며 메드베데바의 기록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정작 김연아는 이 일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다. 아마 언론과 인터뷰를 하더라도 진심으로 메드베데바에게 축하와 격려의 말을 보낼 것이다.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개최국 러시아에 유리한 편파판정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을 때도 그랬다. 김연아는 덤덤한데 주변에서 난리였다. 세계피겨연맹에 제소해야 한다거나 평창에서 보복해야 한다는 분노의 성토들이 들끓었다.
필자가 존경하는 선생은 “이루었으나 더 이루어야 하므로 시는 언제나 이루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예술이나 학문처럼 점수를 매겨 평가할 수 없는 노력들은 `언제나 이루지 못하는` 경지를 피안(彼岸)에 두고 있다. 나는 2014년 소치 올림픽 당시 김연아에게서 그걸 보았다. 이미 모든 것을 이룬 한 인간이, 언제나 이루지 못하는 경지를 향해 뛰었고, 마침내 다다랐다. 더 이루었다.
김연아가 다다른 곳은 높고 빛나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 곳이야 이미 무수히 올라섰다.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점수로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루지 못하는 것`을 이루려는 그녀의 시야에 메달이나 등수 따위는 없었다. 그건 애초에 우리들의 범속한 화두였다. 마지막 경기는 어떤 다짐이나 약속도 아니고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와 스스로 작별하는 시간이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얼음 위에 가장 빛나는 몸짓을 선물했다. 자기 자신에게 애틋하지만 담담한 인사를 고했다. 그건 사랑의 대상을 향한 최고의 예우로, 내가 살면서 본 가장 근사한 오마주였다. 4분 10초의 연기가 아니라 스케이트를 신었던 18년의 한 생애였다. 그리고 결국 `언제나 이루지 못하는` 경지를 이루었다. 김연아의 점수는 점수 너머에 있고, 그녀의 스케이팅은 피겨스케이팅 너머에 있다. 김연아를 생각하며 메드베데바의 경기 영상을 봤다. 확실히 기량이 뛰어나 보인다. 정말 잘한다. 그런데 감동은 느껴지지 않는다. 예술성이 풍부해 보이거나 미적 고취를 일으키거나 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기술적으로 훌륭하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라 정말 그렇다. 그녀가 김연아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김연아보다 뛰어난 스케이터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노래방에서 100점 맞는다고 해서 노래 잘하는 게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정부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문화예술인들을 감시 및 관리한 것도 예술을 점수 매겨 평가하려는 어리석은 발상의 결과다. 진정한 예술은 리스트 너머에 있다. 예술은 점수로 평가하는 지원사업 따위에 종속돼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숫자와 점수들이 나를 대신하고 있는가. 등수와 학점으로 능력은 물론 인성까지 평가받고, 영어 점수와 연봉으로 삶 전체가 저울대에 오른다. 정육처럼 등급과 무게로 계량되는 숫자놀음의 굴레에 우리는 갇혀 있다.
그러나 삶을 위한 노력들은 점수를 매겨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은 늘 이룬 것 같지만 이루지 못하고, 언제나 이룰 수 없는 꿈을 쫓아 나아가는 무모한 여정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점수 너머에 있다. 나라는 한 사람을 점수와 기록이 결코 말해줄 수 없다. 사랑이나 행복, 또는 꿈이라는 추상들, 그 이루지 못하는 걸 이루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이루며 한 걸음 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