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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리운 계절

등록일 2016-11-09 02:01 게재일 2016-11-0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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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섬진강변에 `살뿌리가든`이라는 매운탕집이 있다. 지금은 폐업했다.

지난해까지 그곳 주인이었던 새터민 이경철씨 내외에게 정말 많은 신세를 졌다. 귀한 몽골 말젖술을 얻어 마시기도 하고, 공짜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방값도 안 받고 뜨끈한 아랫목을 그냥 내어주었다.

그 집 식구들이 전부 휴가를 가 식당이 텅 빈 적이 있는데, 그 땐 아예 생활하는 안방을 쓰라고 방 열쇠 숨겨놓은 곳까지 알려주었다. 몹시 고마워 나도 그 집 갈 때마다 빈손으로 가지 않았다. 작년 이맘때 남원 시내에 `향토가든`이라는 이름으로 식당을 이전 개업했다. 그때 두어 번 찾아가 맛난 어탕을 먹었다. 봄에 만나길 약속하고 돌아서자 겨울이었다.

늘 그 자리에 있겠거니, 별일 없이 잘 계시겠거니 생각하며 다음에 가야지 미루다가 가을이 되었다.

지인들에게 살뜰히 연락을 챙겨 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동안 전화 한 통 드리지 못했다. 그러다 보름 전, 섬진강에 갔다가 불쑥 그 집을 찾았다. 과일바구니 하나 사들고 남원 진고개 먹자골목에 들어섰는데, 향토가든은 없고 웬 대패삼겹살집이 있었다. 가게도 사람도 다 바뀐 것이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급히 장사를 접고 연락처도 바꿀 만한 변고가 있던 걸까 걱정이 되었다. 진작 한번 찾아가지 못한 게 미안하고 속상했다. 허탈한 마음에 과일바구니 손잡이만 자꾸 매만졌다.

엊그제, 동네 노가리집에 가 맥주를 마셨다. 몇 달 전에 문을 연 집인데 처음 가봤다. 내가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백반집을 하던 `금식이 아빠`가 평생 모은 돈으로 낸 가게다. 나는 금식이 아빠가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이나 낮이나 늘 낡은 오토바이에 철가방을 싣고 음식 배달을 다녔다. 하루도 쉬는 걸 보지 못했다. 좋은 재료를 아끼지 않고 그릇에 담아주었고, 싼값에 팔았다. 장사를 마친 늦은 밤이면 경광봉을 들고 방범대원으로 봉사했다. 그분이 근사한 가게를 갖게 되어 내가 뭉클하고 기쁘다.

서빙을 하는 젊은 남자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내가 쳐다보자 그도 나를 힐끔힐끔 보았다. 계산을 할 때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 집 아들이죠?” 물었다.

“이름이 주화 맞죠? 형은 금식이. 옛날 `골목식당`하던 때, 그러니까 우리 어릴 때 골목에서 매일 같이 놀았는데, 기억나요?” 그제야 그가 반갑게 웃으며 나를 알아보았다. 20년 만에 본 사람인데, 단 한번 눈맞춤에 20년이 고작 하루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없어진 그 골목의 풍경, 함께 뛰놀던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 그 골목 허름한 공장에서 빵 포장지 만들던 우리 엄마, 일 마친 엄마 손잡고 집으로 걸어가던 저녁의 달빛, 골목식당서 순댓국에 소주 마시고 불콰해진 아버지, 그 젖은 어깨와 무뚝뚝한 손, 평생 단 한 번의 따뜻한 말, 가로등 불빛에 스민 유년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가까이 있어도 20년 동안 한 번을 못 본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다. 불과 얼마 전까지 보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볼 수 없게 되고, 궁금해 찾아가면 아주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더 달아난다. 그리운 사람은 계속 그립고, 그리움 바깥에 있던 사람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추억을 몰고 온다.

찬바람 부니 사람이 그리워진다. 사람에게로 가던 마음의 오솔길마다 단풍들었다. 사람 빈자리는 시퍼렇게 시리고, 사람 든 자리는 봄볕 너울진다.

대통령도 사람이 그리워서 최순실을 옆에 두었다. 혼자라서 외로웠다고 울먹이며 고백했다. 외로우면 외로운 자리에서 내려와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면 될 텐데, 안타깝다. 우병우도 사람이 그리웠는지 후배 검사들과 이야기꽃 피우러 검찰청에 간 모양이다. 손님에게 따뜻한 차도 내어주고 점퍼도 빌려주는 검찰청 사랑방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상상력을 조금 발휘하면 족발도 시켜 먹고 술도 한잔 마시고 밤새 고스톱도 치다가 아침엔 사우나도 갈 것 같다. 그렇게라도 외로움을 달랬으면 좋겠다. 앞으론 진짜 외로워질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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