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물든 언덕에 들꽃 따러 왔다가 잠든 날, 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외로움 젖은 마음으로 하늘을 보면 흰 구름만 흘러가고 나는 어지러워. 어지럼뱅뱅 날아가는 고추잠자리….”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한 대목이다. 나는 이 노랫말만큼 근사한 시가 또 없다고 생각한다. 이 노래를 들으면 태어나 처음 자기존재의 근원과 죽음이라는 한계에 대해 본능적으로 감각한 한 소년의 두려움과 고독이 느껴진다. 노래에서부터 문학적, 철학적 사유가 촉발된다.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내 맘에 고독이 너무 흘러넘쳐. 눈 녹은 봄날 푸르른 잎새 위에 옛사랑 그대 모습 영원 속에 있네”라고 노래한 이문세의 `옛사랑`도 그렇다. 이영훈이 쓴 노랫말은 한 편의 시다. 가사가 환기시키는 보편 정서와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같은 감각적 이미지는 좋은 시가 가져야 할 미덕으로 충분하다. 이런 경우 시와 노래 사이에는 종이에 인쇄되느냐 아니면 가수 목소리에 실려 나오느냐의 차이만 있게 된다.
한 문학평론가는 조용필 노래가 지닌 문학성에 대한 고찰과 그의 전기를 담은 `조용필 평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영훈의 `광화문 연가`와 루시드폴의 `물고기 마음`은 노랫말을 책으로 엮은 가사집인데 이미 7년 전에 출간된 바 있다. 류근 시인의 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김광석이 부른 것이나 김남주의 시를 안치환이 노래한 것은 무척 잘 알려져 있다. 우리 시에 현대음악을 입혀 랩과 보컬, 댄스 퍼포먼스로 표현하는 `트루베르`의 음악을 나는 좋아한다. 플라시도 도밍고와 존 덴버 듀엣의 유사품이든 아니든 간에 박인수, 이동원이 부른 `향수`는 아름답다.
시와 노래, 문학과 음악은 경계를 넘나들며 상호 보완한다. 노래의 통속성이 인쇄문자의 엄숙함을 입어 정형 미학을 얻기도 하고, 문학의 경직감이 노래를 통해 한결 가볍고 편해지기도 한다. 나는 노래 부르는 것만큼이나 시 암송하는 걸 좋아하는데 차를 타고 가면서 서정주의 `화사`나 `자화상`, 이성복의 `연애에 대하여`, 정지용의 `유리창1`, 전윤호의 `늦은 인사` 같은 시를 외우다 보면 목소리의 떨림과 굵기, 고저장단, 박자, `꺾기`가 신경 쓰인다. 시를 마치 노래처럼 대하는 것이다. 꼭 노래 부르는 기분이 든다.
기독교에서는 찬송을 `곡조 있는 기도`라고 표현한다. 문학적 수사와 철학을 담고 있는 노래를 곡조 있는 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와 음악은 하나였고 중세시대 음유시인은 곧 가수였다. 조동진, 김민기, 정태춘 등 문학가들이 유독 좋아하는 가수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문학가들도 `노래하는 시인`이라든가 `시 쓰는 가객` 등 시인의 칭호와 대우를 쉽게 허락한다.
그런데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받은 건 못마땅한 모양이다. 그의 노랫말이 시적이지 않아서, 문학적으로 뛰어나지 않아서 비판하는 건 수긍해도 대중음악가가, 가수가 어떻게 노벨상을 받느냐고 따지는 꼬장꼬장한 태도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동일성의 원리로 타자성을 배격하는 폭력은 나치나 IS만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지나친 순혈주의, 정통주의 역시 폭력이 될 수 있다. 이번 노벨문학상을 두고 문학의 굴욕이니 조롱이니 하며 탄식하는 사람들 모습에서 `장미의 이름`의 호르헤 수도사가 언뜻 보인다.
노벨문학상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누가 받으면 또 어떤가. 상이 문학과 예술,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문학이 인간에게 정신의 풍요 또는 궁핍을 준다면 밥 딜런의 노랫말은 충분히 문학적 기능을 하고 있다.
나는 내 마음의 노벨문학상 장사익 `찔레꽃`을 들으면서 가을처럼 깊어지는 중이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처럼 울었지”
아, 울고 싶다. 나는 이보다 좋은 시를 쓸 수 없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