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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인간과 문학

등록일 2016-06-09 02:01 게재일 2016-06-09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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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가끔 중고등학생들을 만날 때가 있다. 대전 출신지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의 권유 같은 것을 안듣고 배겨낼 재주는 없다.

만나면 옛날 고등학교 때 크던 얘기도 하고 공부하는 얘기도 하고 옛날에 읽던 소설 얘기도 한다. 기회가 되면 심청전이 어떻고 금오신화가 어떻고 하는 얘기도 할 때가 있다. 나중에 학생들 질문 받고 대답하다 보면 그중에 꼭 모범생이 있어 소설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을 때가 있다. 소설 공부라는 게, 물론 소설 쓰는 공부가 아니요, 국어교과서 같은 곳에 나오는 소설을 어떻게 하면 잘 공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공부의 어려움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이해가 잘 안된다는 데 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래도 소설은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빠짐없이 실려 있으니, 다른 공부 잘 하는 학생도 자칫하다 소설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하면, 한 마디로 성숙에 관련된 문제라 할 수 있다.

요즘 청소년 소설이라는 말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특화된 영역이요, 보통 소설은 어른들 읽으라고 쓴 것이 많다. 그러니 청소년, 중고생의 눈으로 쉽게 이해가 가지 못할 장면도 더러 있게 마련이다.

그럼 눈높이에 맞는 작품만 엄선해서 실어야 하지 않느냐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수학 공식처럼 맞추기도 어렵고, 또 눈높이의 기준이나 척도를 맞추기도 어려우며, 뭣보다 쉬운 작품만이 성장발육에 도움이 된다고 확언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왜 영어, 수학에 어려운 문제가 있겠는가?

소설을 잘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물론 어휘나 문장 인식 능력이 높음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영혼이 얼마나 성숙했는가에 관련된 문제라 할 수 있다. 필요한 정도까지 자라지 못한 미성숙함, 또 겉보기에만 꽤 자란 것처럼 보이는 웃자람으로는 소설 읽기가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니까 소설은 그것을 읽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세계를 성숙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고, 역으로 그만큼 성장한 친구만이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한 영역이다.

성숙한 인간을 `만드는` 것, 이것이 어떻게 보면 국어라는 한정된 과목을 넘어선 소설 교육의 목표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문답을 주고받는 학생들을 그네들이 표나게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얼마나, 어떻게 알고, 이해하고 있는지 헤아려 본다. 말하자면 이 아이들이 얼마나 성숙한 인간인지 만나는 내내 따져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즘 학생들, `천진난만한` 학생들이 많다. 좋게 말하면 그렇고, 조금 낮추어 말할 수 있다면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눈에 보이는 손익 산수에는 빠른 편이라 할 수도 있고, 하지만 세계가 움직이는 전체적 양상을 살피거나 특히 타인들의 동정을 헤아리는 데는 서툰 면이 있다.

어디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것을 아이들 자신의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부모들인 어른들의 가치의식, 삶의 태도와 방법이 켜켜이 쌓여 아이들을 이른바 `살아남는 법`에 강한 동물성 인간으로 키워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모든 문제가 윗세대의 책임만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성년인 만큼 윗세대의 책임의 몫은 작다고만은 할 수 없다.

우리의 다음 세대, 다다음 세대 아이들을 어떤 인간으로 양성할 것인가? 자기 자신의 생존에 골몰하는 강한 인간이 넘쳐나는 사회라면 그곳은 과연 기쁘고 즐거운 곳이 될 것인가?

성숙한 인간이란 세계가 자기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친구들이 이 소설적인 세계를 더 잘 알고 이해하고 또 도와줄 수 있으리라.

요즘 학생들도 헤르만 헷세의`데미안`을 읽는가, 어떻게 읽는가? 궁금하다. 옛날, 위의 가난한 세대들은 세로로 인쇄된 그런 책들을 읽고 가슴을 졸였건만. 지금 우리의 후배들도 그러하고 있겠지, 기대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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