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고요히 김이설 문학동네 펴냄. 소설집
소설가 김이설(41)씨는 소외되고 결여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곳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작가다.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열세 살`이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후 올해로 등단 10년을 맞은 김 작가는 그동안 첫 장편 `나쁜 피`와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중편 `선화` 등을 통해 사회의 최하층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생존의 몸부림을 처절하게 그리곤 했다.
엄마와 노숙 생활을 하다가 아비를 알 수 없는 아이를 낳게 되는 소녀(`열세 살`), 외삼촌의 폭행과 주변 남성들의 성폭행에 무방비로 노출된 삶을 살다 죽은 지적장애인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가슴 속 상처로 안고 사는 30대 중반 노처녀(`나쁜 피`), 빚 때문에 가족과 흩어져 대리모가 된 여대생 등 남루한 현실과 그 속에서 발버둥치면서 소진해 가는 사람들(`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화염상모반이라는 선천성 병으로 얼굴에 짙은 얼룩으로 생을 무겁게 누르는 아픔을 갖고 살아가는 처녀(`선화`)….
작품마다 불편하고 어두운 사회문제를 파고들며 차세대 여성 소설가로 주목받으면서 동세대 작가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소설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2010년에 펴낸 첫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후 꼬박 6년 만에 펴낸 두번째 소설집 `오늘처럼 고요히`(문학동네)가 출간됐다.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집념 혹은 치열함을 느끼게 한다”(소설가 은희경)라는 평을 받으며 제3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부고`와 2016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으로 선정된 `빈집`을 포함해 총 9편의 소설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을 통해 김이설은 폭력이 우글거리는 밑바닥 삶에 여전히 현미경을 들이대 그 세계의 진상을 선명히 감각하게 하면서 그 세계에서 한 발 떨어진 채 지켜온 우리의 평온함이라는 게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되묻는다.
그같은 벗어날 길 없는 세계에서 삶은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가, 아니 그런 삶도 과연 지켜나갈 만한 것인가, 라는 둔중하고도 무서운 질문을 던진다. 그리하여 `오늘처럼 고요히`라는 제목은 수록된 소설들의 전체 이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오지 않으리라는 걸 체득한 인물들이 내뱉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바람이 된다.
소설집 가장 처음에 자리한 `미끼`는 김이설 스스로 “그동안 보여준 소설의 정점 같은, 더이상 비슷한 작품을 쓸 수 없도록 여한 없이 쏟아부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폭력이 대물림되는 과정을 야성적으로 구현해낸 작품이다. 아버지가 창고에 가둬놓고 물고기를 낚아채듯 함부로 짓이기던 여자를`엄마`라 부르던 `나`가 어느 순간 또다른 여자를 끌고 와 아버지보다 더 무자비한 방식으로 여자를 창고에 던져넣을 때, 우리는 폭력의 연쇄 속에서 증폭되는 것은 오로지 더 큰 폭력밖에 없다는 선뜩한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악몽보다 더 지독한 현실을 그려낸 `흉몽`을 통해서도 차갑게 전해져온다. 남편의 실직 후 불어난 빚을 갚고자 모텔에서 밤낮없이 청소 일을 하며 버텨가던 `나`에게 어느 날 남편이 찾아온다. 구취를 풍기는 돈가방 하나를 들고서. 출처가 미심쩍은 돈가방도, 횡설수설하는 남편도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고, 참담한 삶이나마 근근이 이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결말일 것이다. 그래야만 적당한 불편함을 잠시 느끼고 우리 역시 원래의 세계로 안전하게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을 따라가다보면,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는 서로를 옭아매는 것 외에 서로에게 어떤 의미도 돼주지 못한다는 작가의 냉혹한 시선과 마주하게 된다. 부모님의 이혼-성폭행-친모의 죽음-애인과의 이별-중절 수술 등 끊임없이 바닥으로 휘몰아치는 상황 속에서 `나`를 위안해주는 사람은 아빠도 오빠도 아닌,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지닌 의붓엄마이며(`부고`), 가족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왔다는 그 자부심 하나로 폭언을 일삼는 아버지를 피해 `나`가 잠깐이나마 웃음짓는 순간은 동료들과 함께 시답잖은 농담을 할 때이고(`한파 특보`), 가족 중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비밀을 간직한 `나`가 연약하나마 어떤 희미한 연결감을 느끼는 대상은 국적도 다르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민호 엄마다(`비밀들`). 우리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이 가족 아닌 타인이라는 것은 엄정한 진단이지만 동시에 폭력이 휩쓸고 난 이후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그 방향을 모색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희망을 가져다준다.
/윤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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