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루 동안의 여행에서 돌아왔다. 텐트와 침낭, 낚싯대를 메고 가 캠핑을 했다.
`북극의 관문` 트롬소(Tromso)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모닥불 피워 양고기를 구워 먹었다. 온통 흰 눈에 덮여 딴 세상 같은 해변으로 북극해의 파도가 엄숙한 성가처럼 밀려왔다. 어둠마다 얼음이 박혀 있어 바람은 날카롭고, 유리 두드리는 맑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오로라(aurora)`로 불리는 북극광(北極光)을 보기 위해 떨며 밤을 지새웠다. 오로라는 뜨지 않았지만, 더 바랄 것 없었다. 밤은 황홀했다.
피요르드(fjord) 탐사도 했다. 빙하가 지반을 침식시켜 생긴 골짜기에 바닷물이 들어찬 협곡이다. 산악열차와 배를 타고 설산이 커튼처럼 겹친 피요르드를 통과했다. 호수가 맑아 하늘로 솟은 설산이 물속에도 있었다. 그 비현실적 풍경을 글로 설명 못 하겠다. 곧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베르겐 인근 바다에서 낚시로 60㎝가 넘는 금빛 대구를 잡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아름다움이나 생의 환희는 그저 입을 다물게 만든다.
천혜의 자연과 그걸 누구나 공평하게 누리도록 하는 `자연에의 접근권` 덕분에 나는 대자연의 깊은 내부까지 들어가 환상적인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자연에의 접근권이란, 노르웨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산과 바다, 강, 호수, 공터 등 어디에서든 야영과 취사, 트래킹을 허용하는 법적 보장을 뜻한다. 나 같은 방랑객에게는 자연에의 접근권이야말로 복지다.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는 노르웨이 특유의 지리 및 문화, 사회, 경제적 특징에서부터 비롯된다. 땅 크기는 우리나라의 약 네 배 정도 되는데, 인구는 고작 500만명에 불과하다. 어업과 관광산업이야 더 말할 것 없고 심지어 석유까지 나온다. 1인당 GNP는 무려 10만달러에 달한다. 인구밀도가 낮은 만큼 개인이 누리는 몫이 넉넉할 수밖에 없다. 세법도 우리와 다르다. 고소득자에게 적용되는 세율이 훨씬 높다. 복지 재원 마련이 수월하고, 혜택의 분배는 공평하다. 하도 뜨문뜨문 떨어져 사니까 이 사람들도 외로운 거다. 자연에의 접근권이라는 것도 대자연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게나 텅 빈 곳을 누군가가 채워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낯선 이에게 친절한 것도 같은 이유 아닐까.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정신의 제도적 실천인 복지 역시 마찬가지다. 넓은 땅에 인구가 적으니까 사람이 귀한 것이다. 보행자가 길을 다 건너기 전엔 차도 트램도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가진 자들이 더 많이 책임지는 국민성은 환경이 길러낸 습성이다.
우리나라 인구밀도와 1인당 GNP를 생각하면, 우리가 북유럽 수준의 복지를 누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제적 여건이나 법 제도는 차치하고서라도 국민성부터 준비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복지는 제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도 있어야 한다. 약자에 대한 배려, 타인의 실수나 부족함에 대한 관용,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돈이 땅 사도 배 아파하지 않는 여유 같은 것들 말이다. 귀국해서 서울 도심의 횡단보도 하나 건넜을 뿐인데도 몹시 슬퍼졌다.
여행을 하면서, 진정한 복지는 자연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의 풍요와 아름다움. 그걸 누구나 공평하게 누릴 수 있게 하는 것! 명소마다 투기꾼과 기업가들이 몰려가 골프장과 스키장, 카지노, 호텔을 짓는 걸 위락(慰)이라고 부르는 나라에서 복지는 너무 먼 얘기다. 자연의 소중함을 알아야 사람 귀한 것도 알게 된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한국식 복지의 우수함을 보았다. 복지(福祉)는 `행복한 삶`인데, 저녁 8시가 넘으면 마트에서 술을 팔지 않는 노르웨이는 내게 불행과 깊은 절망을 안겨줬다. 천하태평 닐리리맘보인 오슬로 공항 창구는 또 어떤가. 덕분에 두 번이나 환승 비행기를 놓쳤다. 늦게까지 술 팔고, 무엇이든 빨리 처리해주는 것도 내겐 훌륭한 복지다. 그걸로 만족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