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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체 돼지` 몸·입 빌려 이땅의 현실 거침없이 비판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6-03-11 02:01 게재일 2016-03-11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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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라 돼지김혜순시집문학과 지성사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힌다는 평가를 받는 시인 김혜순(61)이 열한번째 시집`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를 발간했다.

제6회 미당문학상과 제16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김 시인은 독창적인 상상적 언술의 최극단으로 한국 현대시의 미학을 끊임없이 갱신해 오고 있다.

강렬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한데 추동하는 김혜순의 시 세계는 시적 화자 스스로 몸이 부서지고 변화하며 격렬한 이미지의 연쇄를 이끌어내는 동시에 몸서리치는 파동으로서의 몸-리듬 혹은 몸-소리라는 새로운 시-언어를 발견·발명하는 데 전력을 다해왔다.

멈추지 않는 상상적 에너지로 좀처럼 자기 반복이라곤 허용하지 않는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며 매번 다른 목소리를 내온 김혜순은 이번 시집에서 “세상의 모든 약한 존재자들을, 죽음과 부활을, 사랑과 욕망을, 성과 식(食)을 제 몸에 구현한 다면체-돼지”(권혁웅, 문학평론가)의 몸과 입을 빌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 이 세계의 부패와 폭력, 비참과 오욕의 현실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붉은 물감처럼, 세계를 핏빛으로 물들이는 돼지들의, 돼지들을 위한, 돼지들에 의한 장엄한 비창”(조재룡, 문학평론가)으로서, 시집`피어라 돼지`는 허섭스레기처럼 너덜너덜해진 우리 삶과 사회를 때로는 조롱과 유머로, 때로는 격렬한 아픔으로 통과하며 “시를 가동”한다.

시집의 1부에 놓인 장시 `돼지라서 괜찮아`는 총 15편의 연작시를 한데 꿰어, 2011년 구제역 사태를 피비린내 진동하는 언어로 그리고 있다.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

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

무덤 속에서 추한 찌개처럼 끓는다

핏물이 무덤 밖으로 흐른다

비오는 밤 비린 돼지 도깨비불이 번쩍번쩍한다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 ―`피어라 돼지`부분

분명 죄는 인간이 지었는데 죽음의 구덩이에 던져지고 종국에는 다시 돼지로 부활하는 무수한 돼지들의 징표를 시인은`부적, 시, 제문, 예언, 기념일, 알레고리, 동물들(분홍 코끼리, 파리, 쥐, 고래 등등) `과 같은 기호에 담는다(2부`글씨가 아프다`). 세상의 모든 약한 존재자들을, 죽음과 부활을, 사랑과 욕망을, 성과 식(食)을 제 몸에 구현한 다면체-돼지의 출현이 시집 곳곳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렇게 무리로 출현한 돼지들이 죽음, 슬픔, 불안의 춤의 여정-상승, 선회, 유전, 변신-을 거쳐(3부`춤이란 춤`) 각자 붉은 장미로 피어나듯 내 자신으로 전신(轉身)하는 순간, 시집`피어라 돼지`를 죽음과 생명이 어우러져 모든 이야기가 집약된 단 한 편의 시로 읽게 될 것이다.(4부`일인용 감옥`)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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