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있는 책에서 좋은 구절을 찾아내는 기쁨,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안다. 그러면 또 그 구절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알 것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문장들은 내가 최근에 읽고 있는 소설에서 밑줄을 그은 것이다. 인용이 길다고 나무라시지나 않았으면.
“웃음은 왕처럼 행동한다네. 자기가 원할 때,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온다네.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적절한 때를 골라서 오지도 않네. 그는 그저 `나 여기 있다`라고 말할 뿐이네. (중략) 이상하고 슬픈 일들이 많은 세상일세. 불행과 번민과 고통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네. 그러나 웃음의 왕이 오면 그가 연주하는 곡조에 맞춰 그 모든 것들이 춤을 춘다네. 피 흘리는 심장들도 공동묘지의 말라빠진 뼈들도, 뺨을 타고 내리는 뜨거운 눈물들도 말일세. 미소를 지을 줄 모르는 웃음의 왕이 음악을 켜면, 그것에 맞추어 모두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춘다네. 웃음의 왕이 오는 건 좋은 일이네. 고마운 일이지. 우리 인간들은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과도 같네.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를 잡아당기는 피곤한 일들 때문에 팽팽해져 있지. 그때 눈물이 찾아오네. 밧줄에 빗물이 내리는 것처럼 말일세. 눈물은 우리를 더 팽팽하게 만든다네. 긴장이 지나치면 우리는 끊어지고 말겠지. 그러나 웃음의 왕이 햇살처럼 우리를 찾아온다네. 그가 다시 긴장을 풀어주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수고로운 우리의 삶을 버텨 나가는 것이지.”
웃음은 확실히 묘약이다. 그것은 우리의 고통을, 적어도 그 웃는 순간만큼은 확실히 경감시켜 주며, 지속적인 효과를 맛보게 하기도 한다. 웃음은 고통을 떨쳐낼 수 있게 해주고 우리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도 한다. 내친 김에 이 믿음과 관련하여 쓴, 이 책의 또 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세상에는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네. 오래된 것도 새로운 것도 있네. (중략) 자네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달란 말이지. 말하자면 이런 거지. 어떤 미국인이 믿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네. 즉, `믿음이란, 우리가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을 믿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야. 우선, 그 사람의 가르침을 따르게. 그 사람 얘기는,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 작은 바위 덩어리가 철도의 화차를 막는 것처럼, 진실의 작은 조각이 커다란 진실이 나아가는 것을 막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세. 알아들었나? 좋아. 그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하세. 그러나 동시에, 그로 하여금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진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해야 하네.”
믿음이란 우리가 사실이라고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믿는 능력이 아니라,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까지도 믿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귀에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고, 내 마음에 믿기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마치 기독교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듯이, 천도교 동학에서 천지만물이 저 한울이라는 근원에서 가지 쳐 나온 분신들임을 믿듯이, 눈앞의 사실을 넘어선 세계를 믿을 수 있는 능력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글귀들을 페이지들 안에 숨겨두고 있는 책의 이름은, 바로, `드라큘라`, 브램 스토커라는, 우리에게 아주 낯선 작가가 쓴, 너무나 잘 알려진 소설이다. 우리들은 하지만 이 `드라큘라` 소설보다는 영화로 더 많이 안다. 하지만 소설 `드라큘라`는 영화보다 자세하고 철학적이다. 적어도 두 시간 정도 들여서는 소화시킬 수 없을 만큼. 인용된 두 부분을 합해서 하나의 `명제`를 만들어 본다. 나는 웃음이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을 믿는다, 라고.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 같다. 내 삶조차도 내가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웃는다. 언젠가, 어떤 방법으로든 새로운 차원이 펼쳐지리라고. 믿음은 우리를 견디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