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실학자 최한기(1803 ~ 1877) 선생은 인사행정 이론서인 `인정(人政)`에서 사람을 평가할 때 주의할 점은 바로“그 사람에 대한 과장된 칭찬이나 비방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 자신이 직접 그 인물을 보고서 내면까지 평가하는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로부터 들은 평가는 여러 차례 전달되는 과정에서 진실성은 점점 옅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인사에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경쟁적인 인재영입은 사람을 섣불리 판단해 잘못 선택하면 선택된 쪽보다 선택한 쪽이 책임이 크다. 다시 말해 인재라 함은 개개인의 특성과 능력에 맞는 직업과 위치에 있어야 비로소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어 인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인기 있고 똑똑하다는 인재들은 그 전공분야에서지 타 분야에서까지 인재로 볼 수 없다. 이런 유형과 오랜 시간 이 사회에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은 더 이상 새로운 혁신적인 발상이 없어 자칫 무리속의 평범한 하나의 구성원으로 세금만 축내는 부정적인 역할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장유(1587~1638)는 `필설(筆說)`에서 그의 벗 중 한사람이 어느 날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황모필(黃毛筆)이라는 붓을 얻었는데 터럭이 빼어나게 가늘고 윤기가 흘러 아주 좋은 붓이었다. 그런데 붓을 한 번 털어 보니 그 속이 더부룩한 게 이상하여 시험 삼아 글씨를 써 보았는데 바로 구부러져 꺾이는 바람에 글자가 제대로 써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속을 살펴보니 거의가 개의 터럭이고 가늘고 윤기가 나는 족제비 털을 겉에만 입혀 놓은 것이었다. 이후 장유를 만나서 사람을 속이는 상술에 대해 분통한 심정을 토로하자, 장유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것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의 사대부라고 하는 자들은 몸을 의관(衣冠)으로 감싸고 언어를 그럴듯하게 구사하면서 걸음걸이도 법도에 맞게 하고 얼굴색 역시 근엄하게 꾸미니 그들을 바라보면 모두 군자나 정사(正士) 같게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남이 보지 않는 곳에 있으면서 이해관계가 걸린 상황을 만나게 되면 평소의 뜻을 바꿔 욕심을 충족시키려 서로 다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고 적고 있다. 이익을 찾아 떠다니는 겉과 속이 다른 당시의 위정자들의 모습을 빗댄 것이다.
임금 순조가 깊은 애도와 함께 “사보(師保)의 중임까지 겸하여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고 군주의 덕을 보좌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은 사람은 바로 영상이었다”라 하며 최대의 예우를 표했던 사람은 당시 권력의 정점인 영의정의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한 노론계 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1730~1802)였다. 하지만 그는 나이어린 순조의 원상(院相)이 되어 당동벌이(黨同伐異·당적이 같으면 동지고, 다르면 물리침)에 주력하여 신유사옥을 일으켜 역사는 그를 그리 훌륭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으로부터 불과 40년도 지나지 않아 `순조실록`을 편찬한 사관의 붓은 “아둔하고 재능 없어 아무런 공적도 남기지 못하고 그저 욕심 차게 제 식구만 감쌌다”는 것이 2년 남짓 되는 영의정 재임 기간의 업적에 대한 평가이다.
김시습은 `매월당집(梅月堂集)` `술고(述古)`아홉 번째 시에서 “개에게 뼈다귀를 주지마라/ 떼 지어 어지러이 다툴 것이니/ 제 무리와 어긋날 뿐 아니라/ 끝내는 주인(국민)과도 어그러지리라.(….)” 역사의 전개가 국가나 국민을 위해 정립된 정치이념이나 정신의 발현이 아니라 뼈다귀 같은 이익을 놓고 떼 지어 무리와 다투다 보면 난신적자가 부귀영화를 누리며 돈과 권력이 정의가 되는 세상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사회는 결국 국민들은 희망이 없어지게 되고 국가는 미래의 동력을 잃게 된다.
그럴싸한 명분과 화려한 수식어를 내세우며 이합집산으로 떼 지어 몰려다니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지금의 정치행태는 국민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개처럼 뼈다귀 같은 이익을 놓고 몰려다니며 다투는 현상과 무엇이 다르랴. 하지만 현명한 국민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인재가 아니라 내면세계가 객체화 되어 국민에게 봉사하는 옥석이 누군지를 구분하기 위해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