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서도 고전문학이 있고 근대문학 또는 현대문학이 있으니, 고전에서 현대로 나아온 과정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문제도 될 수 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나아가는 시기에는 사회혁명을 꿈꾸는 사람도 많았다. 소련 등 현실 사회주의권이 무너진 이후 진보주의라는 것에도 오명이 씌어졌기 때문에, 지금 진보를 말하는 것은 욕 먹을 각오쯤은 되어 있다고 선언하는 셈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는 그렇지 않은 면이 존재했다. 현실 사회주의의 추악한 면을 직접 확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진보주의자들은 막연한 꿈을 꾸기도 했다. 사회주의는 곧 진보요, 진보는 선이라는 것이다.
그때 민족문제에 관한 복잡한 질문이 주어졌다. 마르크스가 제국에 의한 식민지 지배는 식민지의 전근대적 사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근대사회를 이식했기 때문에 무조건 진보적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국에 의한 식민 지배는 진보적이라는 인식이 폭넓게 작동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지식계가 제국의 식민지배에 대한 강렬한 반감에 기초한 저항 민족주의 형태를 띠었다면, 이제 제국주의는 식민지에 진보를 가져온다는 논법이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과거에 반제국주의 노선을 가졌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제국주의의 진보적 측면에 드디어 `눈뜬`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략된 채 비약이 이루어져 있다. 진보라면 다 선인가 하는 것이다. 과연 진보는 다 선인가? 예를 들어 서당을 없애고 공립학교를 세운 것은 다 선인가? 구불구불한 길을 직선으로 펴고 철도를 놓아서 사람들이 빠르게 다닐 수 있도록 한 것은 다 선인가? 그럴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했던 말을 떠올린다. 모든 진보는 상실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시간을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쓸 수 있게 되었다고 근대의 시간관을 예찬하고 또 그것을 일본이 가져다 주었다고 예찬한다. 이들이 간과한 것은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가치는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철로를 놓아서, 서당을 없애서 잃어버린 것은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일본이 근대화를 가져다 주었다고 치자. 그러나 이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없었는가?
있다. 우리는 그로써 민족적, 인간적 가치와 존엄과 권리를 잃어버리고 그들 앞에 노예처럼 무릎을 꿇고 남의 말을 우리 말이라 배우고 일상적으로 두들겨 맞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 생사의 장을 넘나들어야 했다. 그로써 숨진 사람, 무릇 기해던가?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더 놓치고 있는 것은 일본이 가져다 주었다는 근대라는 것은 우리가 그 근대를 위해 싸웠던 수십 년간의 자체적 노력과 계획을 무참히 짓밟은 뒤 그 위에 덧씌운 근대였다는 점이다. 1876년 개항을 전후로 한 시대부터 1905년과 1910년의 국권상실, 그리고 그 뒤의 숱한 저항을 총칼로, 피로써 진압하면서야 그들은 이땅에 자신들의 근대를 `이식`할 수 있었다. 그것이 선이었던가? 근대는 진보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선했던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대, 근대화라는 말로 모든 폭력과 부조리를 정당화 하기 전에 무슨 근대인가, 어떤 근대화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요즘 이른바 위안부 협상 문제로 복잡하다. 어떤 협상인가? 우리의 과거, 일제의 과거를 어떻게 보자는 협상이어야 하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