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를 보내며 저마다 청산유수의 건배사를 쏟아냈지만 `병신년(丙申年)`의 대목에서 대부분 매끄럽게 넘어가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33번째 간지, 병신. 이런저런 생각에 궁금증이 발동해 육십간지를 찾아 봤다. 미래의 어느 해엔가 아이들처럼 장난끼 있는 반응이 나올 경우는 9번째와 54번째의 간지 정도였다. 다시 인터넷을 열어보니 벌써 새해는 여야와 좌우에서 쏘아대는 진영의 악담들이 판치고 있었다. `(새해는)친노+친박이 병신 된다`는 식이다. 얼른 노트북을 덮었다.
장애인들을 비하하는 이 단어를 이제 우리 사회에서 함부로 얘기했다가는 큰일이 난다. 정작 우리가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워 해야 할 `병신`은 국어사전에 나오는 두번째 설명에 해당된다. `모자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땅콩 때문에 비행기를 돌려라며 행패를 부리는 재벌집 딸, 고려를 침략한 몽고군이나 된 듯 만만한 기사나 폭행하는 간장집 부자가 이들이다. 새해의 그 좋은 덕담을 멈칫할 정도로 두 글자가 불편했던 이유가 이들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면 그건 분명 지나치다. 이 말에 대한 이물감의 뒤에는 신체적 장애를 아직도 `루저`와 동일시하는 오래된 편견이 도사리고 있다. 물론, 칠칠치 못한 수준의 행동 또는 처신, 세심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상대에 대한 결례의 수준을 넘어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부류들에 대한 반감의 심리기제도 작동하고 있다.
신체적 장애를 생각해보자. 소설 `객주`만 보더라도 근대 이전, 특히 조선은 온갖 장애의 나라였다. 보부상들이 규율을 어긴 동료인 `동무(同務)`에게 사형(私刑)을 가한 결과로 발뒤꿉이 절단된 경우는 약과이다. 정형학을 비롯해 외과가 취약한 동양의학 체계 아래에서는 사소한 외상조차 곧 장애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이러한 악순환은 서양의술을 선발대처럼 앞세운 식민주의가 이땅에 진출하기 전까지 암흑세계처럼 이어졌다.
장애인에 대한 대우는 그 사회의 선진화를 보여주는 척도이다. 복지정책에서도 가장 앞섰던 세종대왕은 1418년 즉위 원년에 의창의 곡식을 빌려주는 환창을 우선 나눠주라고 명하기도 했다. 반면 히틀러는 장애인을 열성의 피를 가진 게르만인으로 여기고 유태인, 성적 소수자, 집시에 앞서 가장 먼저 학살 대상으로 정한 경우이다. 나치가 첫 번째로 저지른 체계적 대량범죄인 이른바 `T4작전`의 악행은 지금 인류의 이름으로 고발되고 있다. 지난해 9월2일에는 30만명의 장애인을 추모하기 위해 베를린의 티어가르텐공원 4번가에 기념관이 개관됐다. 나치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치사량의 모르핀을 투여해 장애인들을 학살하고 종전 때까지도 병자와 함께 방치해 숨지게 했다.
이제 극단적인 장애인 학대는 저개발국이나 분쟁지역에 국한돼 노골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른바 만만한 사람이나 계층을 깔보는 우리 마음 속의 장애, 사회적 장애는 여전히 재앙처럼 도사리고 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을 천시하는 우리 자신도 저마다 `루저`이다. 과거 장애인이나 빈자들이 차지하던 소외의 자리에는 이주노동자와 청년 백수들이 제 의지와 무관하게 밀어넣어졌다. 하지만 `수도권 시민`에 비하면 `지방의 주민`은 여전히 `디스에이블드`(disabled)요, 흙수저들도 마찬가지다.
대학 때 읽은 문순태 작가의 소설을 오랜만에 꺼내어 봤다. `기구한 인생유전`이란 부제 그대로, 공옥진의 이야기는 온갖 개인적 불운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다. 남동생은 벙어리였고 손수 키운 조카는 곱추였다. 별세한 뒤 아이돌그룹 2NE1 멤버의 고모할머니였다는 사실이 유일한 호사처럼 느껴질만큼 곤궁 속에 살았다. 하지만 그는 춤 속에 그 많은 천대와 아픔을 담아 이웃의 마음을 울렸다. 새해에는 우리도 한번 그 병신춤을 춰보자. 2016년이 아무리 어렵다지만 이웃과 함께 더 나은 사회를 꿈꾸며 이제 온전한 `병신년`을 마음껏 기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