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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에 생각되는 것들

등록일 2015-12-31 02:01 게재일 2015-12-3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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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br /><br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서울은 지금 눈이 내린다. 오후에 비가 내렸는데 저녁으로 바뀌면서 눈송이가 맺혔다. 하루가 몹시 짧아진데다 날이 찌푸리다 보니 여느 때보다 더 빨리, 더 깊게 어두워졌다. 이제 한 해가 곧 저물게 되니, 세상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파리 테러다.`이슬람 국가`에 소속된 테러리스트들이 공연장 같은 곳에서 보통 사람들을 수백 명씩 살상을 했다. 기독교 대 이슬람이라는 대결 사상은 기독교에도, 이슬람교에도 깊이 스며들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의식이 세계를 지배하는 듯하다. 파리의 울부짖음은 그러나 그곳만의, 유럽만의 것이 아니요, 언제라도 우리들 자신의 것이 될지 모르는 두려움을 갖게 한다. 우리가 국가의 이름으로 이 대결의 한축임을 표방한다면 증오와 살상은 우리를 향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도 있다.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 일제가 벌이는 전쟁에 동원되어 성노예가 되어야 했던 할머니들이 지금 한국과 일본 정부에 의해 이루어진 협상안을 향해 그것은 아니라고, 안된다고, 거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의 할머니들이`명자`요, `아키코`가 되어야 했던 슬픈 역사가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으로 우리들의 역사의식을 시험하고 있다. 오늘 신문을 보니, 아베 신조는 한국이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한다면 국제사회의 힐난을 사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한다. 돈 10억엔이라면 `겨우` 100억원이다. 옛날에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 때도 그랬지만, 인색해도 그렇게 인색할 수 없는 자들이 마치 자기들 덕분에 한국인들이 살 수 있게 된 양 역사를 왜곡하는 데는 당해낼 도리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 국우주의자들, 제국주의 사관의 소유자들만이 아니다. 한국 안에도 이들의 역사인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은 세련된 세계주의자들인 듯 분장을 하고 있다. 얼마전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이 문제가 되자 이른바 지식인들이 표현의 자유, 학문의 지유를 걸고 성명을 냈다고 한다. 이들이 다 같은 사고의 소유자들은 아니고, 정부의 처사도 처사지만, 종군 위안부 문제의 심각성과 그 책이 주장한 바를 생각하면, 성명이 맞는 방법이었는지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된다.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헬 조선`이라는 말이 젊은이들 사이에 일대 유행어가 되었다는 점이다. 풀이를 해보면 지옥 같은 한국이라는 뜻이 될 텐데,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심리적 절망감을 단적으로 대변한다. 나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또 가급적 바르고 고운 말을 쓰자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여기저기서 아무렇지도 않게 발설되는 이 구호에는 마음이 편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 청년들의 현실상황은 인내하라든가 힘을 내라든가 하는 말로는 위로가 될 수 없다. 한국의 젊은이들의 자살률은 매우 높고 이를 해소할 수 있는 특별한 방책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저런 상황들을 일별해 보면서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한 여성작가가 쓴`물속 골리앗`이라는 작품이다. 작중에 비가 엄청나게 퍼붓는다. 재개발 지대 아파트가 물에 잠길 정도라 할까. 이 넘치는 물은 성경에 나오는 대홍수를 떠올리게 한다. 곧 뗏목이 필요한 상황이다. 모든 것이 물에 잠길 것이고, 물이 목까지 차오르게 될 것이다.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바라보는 내 눈에 비친 현실이 꼭 그처럼 보이는 것은 나의 과장벽 때문일까, 또는 비관주의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12월 31일의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모든 절망과 비관은 뒤로 물러나고 새로운, 밝아오는 한 해를 서로 축복해 주는 함성 소리가 서울 종로에 메아리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기쁠 것 같지 않다. 그러기에는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고통과 절망과 어려움이 놓여 있다. 그것이 내 일부처럼 느껴지는 한 나는 새로운 한 해를 기뻐할 수만은 없다. 가장 불행하고 가장 낮은 사람들과 함께, 가장 슬픈 이들과 함께 삶을 나눌 수 있는 때를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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