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리라는 재일 한국인 작가를 좋아한다. 그녀는 솔직하고 대담한 성품의 소유자인 것 같고 자신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타개해 나가는 과정 자체를 문학으로 승화시켜 왔다. 그녀의 처녀작은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라는 것인데, 이 자전적인 소설이 출판되자 소설 속 등장인물의 실제 모델로 추정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이 작품을 사생활 침해와 명예 훼손으로 문제를 삼았다고 했다. 작가의 자유가 선행하는 것일까, 작가가 모델로 삼은 사람의 인권이 선행하는 것일까? 나는 처음부터 작가의 자유 쪽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작품이 실제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면 작가는 작품의 모델을 그릴 때 간단히, 부주의하게 처리할 수 없다. 이 재판은 꽤나 유명한 사례를 제공했고, 8년이나 끈 재판 끝에 유미리는 작품을 고쳐 쓰고서야 작품을 재출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요즘 내가 고민하는 것 중 하나는 무엇을 어떻게 쓸까 하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내게 주어진 시간이란 많지 않음을 깨닫는다. 무슨 중병에 걸려서 그런 것이 아니요, 인생 자체가 어차피 시한부인 까닭이다. 먼저 시간을 아끼고 마음을 아껴서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글을 써도 다 허공중에 흩어져 먼지더미가 되리라.
그림을 그리고 시도 쓰는 누군가 송년회 자리에서 자기는 그림을 그릴 때 그리고자 하는 대상에게 말을 걸어본다고 했다. 내가 너를 그려도 좋겠니? 하고 물어본다는 것이다. 원래 나무하고도 말을 한다는 사람이니 그런 것이려니 하다 문득 깨닫는 게 있었다. 대상을 향해 물어본다는 것, 내가 그리고 내게 그려지는 그것을 향해 내가 너를 그려도 좋겠느냐고 물어본다는 것은 내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그리는 행위의 한갓 객체가 아니라 또 하나의 대화의 주체로서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 순간, 나는 이 물어보는 행위 속에 담긴 뜻을 깊이 인식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시도 쓰고 소설도 쓰지만 시적 표현이나 소설적 표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사물을 향해 너를 그려도 되겠느냐고 물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물어보는 순간에, 또 그렇게 물어보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에, 나는 그 대상의 입장에 서서, 그 대상과 더불어, 많은 대화를, 생각을 나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럴 것 같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힘을 가진 자로서 대상을 규정짓기 전에 그림에 나타날 그 대상이 가진 권리와 가치를 먼저 생각하고 그것이 자신이 어떻게 그려지기를 원하는지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멋진 창작방법이 될 것이다.
생각을 연장해 보면, 나는, 그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살아 있는 관계를, 아니 나와 나 아닌 살아있는 존재들의 세상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해줄 것 같다. 옛날 사람들은 세상 만물에 다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고 하며 그것을 원시적 신앙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원시적인 인식에 그칠 뿐이지 되물어 봐야 할 때가 되었다. 저 나무에 혼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는 과학적 관찰과 현미경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살아 있는 것들, 또 살아 있지 않다고 믿어지는 것들에도 사실은 우리가 모르는 혼의 형태로 그의 생명과 사유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 아닌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절대로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 없고 그들 또한 이 세계의, 나와 다름없는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너를 그려도 좋겠니? 확실히, 이 물음에는 문학을 한갓 자기 욕망의 실현 도구로 삼는데서 벗어나 타자와 함께 하는 삶을 향한 배려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문학만이 아니라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공유해야 할 원리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너를 이렇게 대해도 좋겠니? 내가 너에게 이렇게 말해도 좋겠니? 내가 너에게 이렇게 주어도 좋겠니? 이 물음은 무한히 다양한 형태로 변주, 변형되면서 이 세계를 타자에 대한 공동체적 배려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