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고 하며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에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리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알려준다. 따라서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와 같이 되신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신다. 그 실천의 모습은 어떤가?
요한은 예수님이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에게 다정하게 질문하는 분으로 묘사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직역하자면, 온전해지고 싶으냐이다. 마음에서 원의를 일으킨 다음 말씀으로 회복시켜 주었다. 약한 이에게는 한 없이 다정하여 말씀의 힘으로 치유를 하시지만, 힘 있는 자 앞에서는 당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았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을 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하게 알렸다.
얼마 전 세간의 집중을 받았던 인물이 있다. 민노총 위원장 한상균씨와 조계종 화쟁위원장 도법 스님이다. 도법스님은 어느날 한상균씨를 만났을 때, `불덩어리` 앞에 선 존재임을 깨닫고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한상균씨는 도법 스님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 궁금해진다. 한상균씨는 어느 모임에서 세상을 뒤집고 전국을 마비시키겠노라고 했다는데 그 위원장이라는 직분에서 주어지는 힘으로 그렇게만 사용하는 것이 효용적일까 자문해 본다.
어느 모임에서 연사로 오신 분은 자신의 자리에서 함께 하는 분들과 소통을 하기 위하여 6개월 동안 힘을 빼는 훈련을 했다고 했다. 또 다른 연사는 40년 직장 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힘없는 이에게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한 삶을 회고하였다. 특히 어느 순간 일 중심에서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 한 마디는 “관계가 남는다.”고 했다. 우리 앞에 산적한 일이 많다. 그것은 적대적이 아닌 사랑의 신뢰 관계 안에서 풀어갈 숙제이다.
시골의 연로한 노인이 계시는 집에 연탄 배달을 하며 잊혔던 기억을 떠올렸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나 만났던 연탄, 언덕 위 동네에서 착화탄을 피워가며 다시 불심을 되살렸던 추억, 누구는 연탄가스로 급히 병원으로 옮기며 놀랐던 기억까지. 안도현시인은 연탄이란 주제로 울림을 주고 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날씨가 이렇게 차가워지고 비까지 내리는 날이면 더욱 시인의 질문은 삶을 돌이켜 보게 한다. 이웃에게 어떤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지를….
리웨이원(李維文)은 `인생에 가장 중요한 7인을 만나라`라는 책에서 삶에 힘이 되는 사람을 찾도록 지혜를 주고 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언제 그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삶에 끼치는 영향을 설명한 것이다. 특히 그는 “인생에는 언제나 자신을 `일깨워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신을 이끌어 줄 멘토를 찾고 동료를 통해 함께 성장하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사람을 전정으로 필요하고 또한 멈춤 없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자발적 노력이 중요하고 했다.
인생이란 경기장에 입장해 출발선에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하고 조금 늦게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상처를 넘어서 밖을 쳐다볼 수 있게 된다. 상처를 넘어 볼 수 있는 것은 내적으로 하느님을 닮은 아이, 브래드쇼(Bradshaw)가 말하는 신적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신적인 아이를 통해 우리는 참된 본질과 만날 수 있는 고요의 공간에서 하느님은 우리 안에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