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은 빛에 민감하여 새벽이 오는 여명이 트면 어김없이 `꼬끼오`하고 울기 시작한다.
모든 조류들은 새벽에 울지만 어둠을 뚫고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은 오랫동안 농부들의 새 아침을 알리는 신선한 자명종이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 찬란했던 정치인으로서의 한 인생을 마감하였다.
1979년 야당 당수 자격을 박탈 당하고 결국 국회에서 강제로 쫓겨나면서 그가 남긴 이 한마디는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많은 이들의 아이콘 같은 말이었다.
당시 유학준비로 동분서주 했던 필자는 한 중앙지 정치면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을 잊지 못한다. 그 사진은 그가 국회를 떠나면서 남긴 긴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의 모습 아래 그 유명한 “닭의 목을 비틀어도…”라는 사진 설명이 붙어 있었다.
결국 그 그림자는 그후 여러가지 정변을 초래했고 민주주의 정치의 장을 여는 시발점이 됐다.
그 시절 철없이도 “혹시 이러다가 유학을 못 가면 어떻게 하나”라고 걱정하던 기억이 난다.
김 전 대통령은 중학교 시절 일본 학생들과 자주 다툼을 벌이며 어려서부터 애국심과 정의감을 키워왔다고 한다. 대학교 2학년 때 정부 수립 기념 웅변대회에 참가해 외무부장관상을 받았고, 이를 눈여겨 본 당시 외무부 장관 장택상 전 총리가 비서관으로 불러들여 정계에 입문했다.
6·25 전쟁이 끝난 뒤 이듬해인 1954년 5월 자유당 소속으로 경남 거제시 지역구에 출마해 26세의 나이로 한국 정치사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다. 이 기록은 한국 정치사에서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국회에 입성한 뒤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1955년 4월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의 길`을 걷게 된다.
김 전 대통령은 1969년 신민당 원내총무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주도하자 유신과 권위주의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초산 테러` `가택연금` 등 온갖 고초를 당하기도 하면서 야당 기수의 길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걸어왔다.
김 전 대통령은 결국 1993년 문민정부의 첫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하나회 척결과 군대 인사 개혁,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 1995년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 등 과감한 개혁을 실시하면서 지지율 90%가 넘기도 했지만, 서해 페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 수많은 대형참사를 맞고 임기말 IMF 금융위기로 인해 인기가 추락하며 그 오랜 세월의 민주화 투사의 이미지가 희석되기도 했다.
정치인들의 애용하는 두개의 어구가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하였다”는 윤동주의 시와 “닭의 목을 비틀어도…”라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어구라고 한다.
전자는 정치인들이 본인의 깨끗함을 강변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정의는 반드시 실현된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그 암울했던 7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비틀어지는 닭의 목을 직접 경험하면서 젊음을 삭이던 시절이 기억난다. 어떤 해는 일년 내내 대학의 문이 닫혀져 있어 강의를 제대로 듣지 못했던 해도 있었다.
기숙사 한구석에 모여서 무엇이 진정 정의이고 무엇이 진정 타협인가라고 고민하던 그런 젊은 시절이었다. 절대로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그런 세월이었고 여러 친구들이 투옥되기도 하였다.
모든 역사의 공과는 아마도 더 세월이 흘러야 판단이 될지도 모른다. 당시의 불가피한 상황일수도 있었고 아니면 젊음이 주도한 민주화의 투쟁이 필요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은 좀더 세월이 흘러야 할 것 같다.
역사의 진실은 후에 판단한다고 하여도,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외쳤던 “닭의 목을 비틀어도…”는 아마도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면서 고초를 당하는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아이콘의 어구로 자리잡을 것이다.
평생을 민주화에 바친 고인의 명복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