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문학동네 펴냄, 252쪽
돈을 받고 남 대신 책을 베껴 써주는 일을 `용서(傭書)`라고 한다. 이 일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던 용서인들의 이야기는 애처롭다. 출판문화가 발달한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까지도 용서로 생계를 꾸린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 제일의 책벌레 이덕무도 그중 한 명이었던 듯 그의 편지에는 책을 베껴 쓰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다산이 제자들에게 필수로 교육했다는 초서, 즉 베껴 쓰기에 대한 글과 책과 관련된 아홉 가지 활동이 이뤄지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덕무의 구서재 이야기에서는 옛사람들이 어떤 체계로 책을 읽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
2부에는 옛사람의 기록과 관련된 이야기를 모았다. 일기, 편지, 비망록, 책의 여백에 써놓은 단상 같은 것들이다. 밭일을 하다가도 항아리 속에 넣어둔 감잎에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적어뒀다는 중국 선비의 고사를 본떠 이덕무는 자신의 메모집에 `앙엽기`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앙엽기`가 실려 있다.
그 바쁜 연행 길에서도 나비 날개만한 종이쪽에 파리 대가리만한 글자로 보고 들은 것을 정신없이 메모해둔 글이다. 박지원의`앙엽기`는 당연히 이덕무의 `앙엽기`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메모의 왕은 역시 다산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다산의 메모는 하나하나가 소논문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학문적 깊이를 갖추고 있으며 그 필치는 예술작품에 가깝다. 다산의 드넓은 학문 세계는 모두 치열한 독서와 끊임없는 메모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오동잎을 둘러싼 옛사람들의 시와 그림과 인장 이야기는 퍽 낭만적이다.
그 밖에 책의 출전을 메모하는 법,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여러 책을 동시에 읽는 법, 떠오른 생각을 붙잡아 재빨리 적어두는 질서법 등 선인들의 기록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옛 선비들이 일 없는 여가에 문을 닫아걸고 낡은 책을 수선했다는 일화도 흥미롭다. 저자도 자신의 오래된 취미 생활인 `풀칠 제본` 이야기를 실제 사진을 곁들여 상세히 들려준다.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집필한 저자의 독서와 메모 노하우가 이 풀칠 제본 이야기에 다 들어 있는 듯 느껴진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