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대표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겠느냐”며, 노무현정권때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3명의 김용주가 있는데, 자신의 부친은 없다고 했다. 만주에서 군인으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15살 아래의 김용주가 있을 뿐이라 했다. 김대표의 부친은 부산상고를 나와 조선식산은행 포항지점에 근무했고, 그 때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는데, 당시의 야학은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몰래 가르치는 `계몽운동`의 거점이어서, 해촌은 3년만에 직장에서 쫓겨났다. 그후 그는 해산물을 취급하는 기업을 차렸는데, 그 상호가 `삼일상회`였다.
이 명칭은 당장 3·1운동을 연상시키므로 일제는 “상호 고쳐라” 수차례 명령했지만, 해촌은 “三一상회가 아니고, 작심삼일의 三日상회”라며 끝끝내 버티었다. 이렇게 미운털이 박힌 해촌은 “만약 태평양전쟁에서 지면, 쏴죽일 자들이 많은데, 그 중 제1호가 김용주다”란 말을 들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해촌은 산속으로 숨어들었고, 해방소식도 얼마 뒤 산속에서 들었다. 그리고 그는 재산 상당 부분을 던져 영흥초등학교를 설립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나온 학교다.
일제때는 “낮에는 친일파, 밤에는 독립운동가”란 말이 유행했었다. 위장친일·무늬만의 친일을 하면서 실제로는 독립운동자금을 대준 재산가가 적지 않았다. 경주중학교를 설립한 수봉재단이 대표적이다. 해촌도 몇가지 `친일발언`으로 `위장`했지만, 그의 본심은 애국자였고, 교육자이며 정치가였다. 6·25동란때 그는 맥아더 장군을 찾아가 서울의 5대 궁궐과 4대문을 표시한 지도를 주며, 이 문화재를 폭격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해 살려냈다.
야당은 친일논쟁과 인신공격으로까지 몰아가면서 국사교과서 국정화를 사생결단 저지하니, 교과서 논쟁이 친일·친북논쟁으로 비화됐고, 국사전쟁이 난데 없이 정치싸움으로 번졌다. 야당으로서는 내년 총선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공세이고, 여론조사에서 유리하게 나오자 기세가 올랐다. 그러나 학생과 학부모들은 “교과서 아무리 바꿔봐야 교사가 가르치기에 달렸고, 암기과목의 고통을 벗어날 길은 없다”며 역사전쟁에는 관심도 없고, 시끄러운 것이 귀찮을 뿐이다. 야당은 역사논쟁이 총선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을 기대하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교과서 편찬은 행정부에 맡겨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