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내분사태로 많은 시민들이 해외로 망명을 떠나는 기사를 우리는 매일 접하고 있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지나 중서부 유럽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홍수처럼 많다고 한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우선 먹고살기에 바쁘다.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취미나 애완동물 등에는 관심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개나 고양이들을 데리고 피난을 가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굶으면서도 짐승과 물을 나눠 먹으면서 해외를 정처 없이 떠다니는 기사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왜 그렇게 데리고 다니느냐?`고 물으니 `가족 같아서 버릴 수가 없다`고 했다. 사랑은 생명을 초월하는 것을 보여 준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얼마 전 국내 기사에서는 어떤 사람이 개를 자전거 뒤에 묶어서 2~3㎞를 끌고 다니는 끔직한 사진도 보았는데…. 인간의 잔혹한 이면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근래에는 TV 채널이 수십 개나 다양하게 구성돼 있어서 동물농장을 자주 본다. 그 프로에 제일 자주 나타나는 동물은 인간과 약간의 의사소통도 가능한 개들이다. 대부분은 퍼그, 치와와, 말티즈, 시츄 등 키가 작은 애완견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근래에는 키가 큰 애완견은 자연스레 보기가 드물어 졌다. 작은 개들은 리본을 다는 등으로 아름답게 꾸민 것, 미용 등으로 예쁘게 하기, 개들끼리의 경기시합, 특기 자랑 등을 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즐기고 있다. 팔자가 좋은 놈들은 비단 옷을 입은 개가 닭고기 탕을 먹는데 그것은 보기에 좀 거슬렸다.
옛날 집에서 키우던 토종 개(속칭 똥개)는 보통 정도의 키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개들은 거의 볼 수 없다. 요즈음 대부분 개들은 사육장에서 식당의 조리하는 국그릇 속으로 들어가도록 집단으로 키우고 있다. 세계의 여러 종류의 개들이 곳곳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그런 개만 활개를 치는 문화가 되어 버렸다. 나이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된 사람들만 옛날 집에서 키우던 토종 개(똥개)를 보고 싶어 하고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어 한다.
토종개들은 성실하게 집을 지켰지만, 주인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면서 살지는 않았다. 최대한의 관심이라야 겨우 아침저녁으로 식후 남은 밥이나 반찬을 먹는 것이다. 일종의 쓰레기 청소 역할만 했다. 낯선 사람이 보이면 짖어대기가 하는 일의 전부이다. 그러다가 사돈이나 큰 손님이 오면 식탁위의 국 속에 잠기어서 식사용 고기가 될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애완견은 전혀 다른 대접을 받는다. 씻기고 머리를 빗겨주고, 어떤 놈에게는 비교적 고급 옷을 입힌다. 주택 안에서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고 주인의 에도 자주 안긴다. 어떤 개는 국가에 등록되어 있고 미용적으로 보기 좋게 털을 자르기도 한다.
시골출신이어서 그런지 과거의 똥개가 그립다. 과거에 안동 깊은 산골에서 성장할 때, 우리 집에서도 그 개를 키웠으나 애석하게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애기가 똥을 싸버리면 주인은 개를 `워리워리`하면서 부르면 그놈은 재빨리 와서 똥을 싹 다 먹어버린다.
나는 누군가가 똥개를 잘 키워서 외국산 개들과 능력을 경쟁시키는 것을 보고 싶다. 좋은 훈련으로 서양 종의 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보고 싶다. 이것은 마치 시골의 빈한한 학생이 공부를 해서 드디어 대도시의 부자들과 당당하게 잘 살아가는 것과도 같다.
촌스럽고도 용기가 없어서 숨죽이면서 살아왔던 사람이 노력 끝에 열변을 쏟아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과도 비교할 수 있다. 자신감과 용기는 여건이 어느 정도 성숙돼야 자라나기 시작한다. 나는 자라면서 이렇게 용기 표현이 서투르다가 능력이 점점 증진되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이런 것을 우리는 `개천에서 용 나는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똥개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