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펴냄, 110쪽
`피로사회` `심리정치`의 저자 한병철 교수(베를린 예술대학)의 신작`에로스의 종말`(문학과지성사, 김태환 옮김)이 출간됐다. 전작 `피로사회`가 `할 수 있다`라는 성과사회의 명령 아래 소진돼 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고,`심리정치`가 자유와 욕망까지 착취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은밀한 통치술을 파헤쳤다면, 이번 책에서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진정한 사랑이 왜 위기에 처하게 됐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을 펼쳐나간다.
저자는 에로스가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 완전히 다른 사회를 향한 혁명적 욕망”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오늘날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투쟁 가운데 하나인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2013년 독일에서 출간된 `Agonie des Eros`를 번역한 것으로,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이 책의 불어판(Le Desir: Ou l`enfer de l`identique, 2015)에 쓴 서문`사랑의 재발명`이 함께 수록돼 있다. 한국에 소개되는 한병철의 여섯번째 책.
`에로스의 종말`은 “최근 사랑의 종말을 고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려온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역사의 오랜 전통 속에서 사랑에 강렬한 의미가 부여돼 왔다면, 오늘날에는 바로 그러한 의미의 사랑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적은 과연 누구일까? 한병철은 에로스란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인데, 환상이 사라지고 경제적인 법칙만이 지배하는 세계,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랑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두 개인 사이의 가벼운 계약 관계가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대한 근원적인 경험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자아의 파괴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멜랑콜리아`와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눈 속의 사냥꾼들`,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을 예로 하여, 절대적 타자성의 경험으로서의 사랑, 완전한 타자의 파국적 침입에 의해 주체의 정상적인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재난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편으로, 안락함과 나르시시즘적 만족 외에는 관심이 없는 오늘의 세계에서 에로스의 가능성을 짓누르고 있는 실제적인 힘들을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한병철에 따르면,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있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즉, “다르다는 것의 부정성, 즉 할 수 있음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타자의 아토피아(atopia)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을 이룬다.”
사랑의 경험은 불능에 의해 만들어지며, 불능은 타자의 완전한 현현을 위해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과 원리가 삶의 전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현대의 세속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랑은 긍정화되고 아무런 부정성을 알지 못하는 단순한 `성애`로 변질된다.
이 책은 진정한 사랑의 최소 조건, 즉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데 대한 철두철미한 논증인 동시에, 전적으로 안락함과 나르시시즘적 만족 외에는 관심이 없는 오늘의 세계에서 에로스의 싹을 짓누르고 있는 온갖 함정과 위협들을 깨닫게 해준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