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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와 근대일본

등록일 2015-09-18 02:01 게재일 2015-09-1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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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의 소설 `풀베개`(1906)를 읽다가 상념에 잠긴다. 명치시대(1868~1912)를 살아간 지식인이자 문사(文士)로 시대의 고민을 소설로 풀어낸 소세키. 소세키라는 이름은 `수석침류(漱石枕流)`에서 따온 것이다. “돌로 양치질하고, 물로 베개를 삼다”는 의미다. `수석침류`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고집쟁이나, 지기 싫어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라 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도련님` 같은 초기작품을 읽어보면 완미(頑迷)한 고집불통이나 벽창호 소세키를 떠올리기 어렵다. 조선시대의 고루한 딸깍발이 정도는 연상 가능하지만. 그러나 그의 개인사를 차근차근 되짚어보면 역시 뭔가 있다. 그는 국비 유학생으로 1900년 4월부터 1902년 12월 초까지 영국에서 영문학을 공부한다. 하지만 유학생활 중에 정신질환 수준의 모진 신경증에 시달린다.

문제의 핵심은 일본인으로서 영국문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증이었다고 한다. 일본이 유럽의 신문물을 열광적으로 수용해 근대국가로 전환해나갔던 명치 격동기를 살아야 했던 문사의 여린 내면세계가 문제였던 것이다. 소세키는 일찍이 한시(漢詩)와 일본의 하이쿠, `만엽집(萬葉集)` 그리고 일본 선승(禪僧)들의 세계와 회화 (繪畵), 노 같은 전통연희의 세례(洗禮)를 받은 지식인이자 교양인이었다.

느닷없이 불어 닥친 근대 혹은 영국으로 표상되는 유럽의 서슬은 그의 내면풍경을 모질게 흩어버린다.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뇌와 방황이 시작된다. `풀베개`는 그런 정황(情況)을 드러내는 역작이다. 소설에는 동양적인 것과 일본의 정수(精髓)를 대변에 두고, 유럽적인 것과 영국의 미학을 차변에 두고 벌이는 대결이 펼쳐진다. 하지만 소설의 본령에는 근대를 자각해가며 고뇌하는 지식인의 형상이 자리한다.

정신질환에 가까울 정도로 심각했던 신경증을 치료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했던 소설 창작이 훗날 소세키를 전업 작가로 변모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초기창작 대부분이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이라는 점이다. 소세키 소설은 구미(歐美)의 관점에서 보면 무엇인가 어설프고 낯설게 다가온다. 그럼에도`풀베개`를 읽으면서 나는 동시대 조선 혹은 구한말을 떠올리면서 적이 당혹스럽고 안타까웠다.

그가 사유하고 인식하면서 맞닥뜨렸던 근대일본의 초상(肖像)과 작가의 내면세계가 도달한 지적-정신적 수준이 도저했던 것이다. 명치유신이 경과한 지 40년 만에 소세키가 포착한 근대유럽 내지 영국은 새삼 놀라운 것이었다. 불과 2년 반 정도의 영국 체류에서 그는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의 반감(反感)과 깨달음을 양립시켰다. 그의 사유 근저에는 언제나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누가 있기는 했을까`하는 의혹이 머릿속을 맴돈다. 소세키와 동시대를 살았던 조선의 누가 서양미학과 동양 내지 조선의 미학을 이항(二項) 대립시키면서 출구를 모색했을까. 한편으로는 모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하려는 의식적이고 자각적인 노력을 경주한 조선인은 누구였을까! 주어진 것을 답습(踏襲)하지 않고, 나름대로 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길을 열고자 분투한 선각자가 있기는 한 것인가?!

장구(長久)한 세월 중국의 지적-정신적 자산의 세례에 감사하고, 100년 세월 일본과 미국을 모방해온 한반도 아니었는가?! 한반도에 터를 둔 어떤 정신사적-사상사적 물줄기가 지구 공동체를 흐뭇하게 적시고 있는가?! (물론 나는 `동학(東學)`에 문외한(門外漢)이어서 그것만은 예외로 둬야 한다.) 모든 고전유산과 근대적인 것을 인접국에 신세지고 있는 한반도의 상황은 2천년 넘도록 변하지 않았다.

소세키는 모방하는 자신의 내면세계가 수용되지 않아서 그토록 괴로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각성(覺醒)한 일본의 지식인이자 근대인으로 자아 정체성에 대해 끝없이 문제를 던짐으로써 일본의 미래가 되었다. 오늘날 일본이 가지고 있는 모방의 솜씨와 창조의 재능은 명치시대를 살아간 소세키 같은 지식인들의 고투(苦鬪)와 분발에 그 물줄기를 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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