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회 갖은 압박받다 자진폐쇄<BR> 교명·학동 인계받아 새롭게 열어
“1933년 포항읍 인구는 3만명이 넘어 도청소재지 대구에 버금가는 경북 제2의 도시였다. 인구와 읍 규모에 비해 읍내 거주 한국학동을 위한 교육기관은 미미했다. 공립보통학교 1교와 기독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보통학교 1교 등 고작 2교에 불과했다”
고 해촌(海村) 김용주<사진> 선생은 지난 15일 발간된 자신의 평전 `강을 건너는 산`-(도서출판 청어, 이성춘·김현진 편저)에서 일제 치하였던 당시 사립 영흥국민학교를 설립하게 된 배경을 담담히 전하고 있다.
“첫 아이(장녀 김문희)도 무려 8대1의 경쟁을 뚫고 입학을 했다. 하지만 기쁘지 않았다. 학교부족으로 제대로 취학을 못한 다른 어린이들을 보고 교육당국의 거짓정책에 분격했다”며 학교설립의 구체적인 동기를 밝히고 있다.
그러던 중 기독교회에서 운영하던 영흥보통학교가 폐교됐다. 교육당국이 신사참배, 일장기 게양 등을 강요하자 교회 측은 교계명에 위배되는 일이라며 버틴 것이다. 그러나 갖은 탄압이 계속되자 교회측은 자진해 학교를 폐교했다. 1933년 3월의 일이다.
해촌은 우선 가교사 하나를 마련했다. 설립허가까지는 막대한 적립금과 더불어 1년이상의 시일이 소요되기에 교회당 건물 안에서 운영하면 영흥국민학교의 교명과 허가를 인계받는 형식을 취하기로 교회측과 합의를 봤다. 구 영흥국민학교는 학교자체의 독립된 교사도 없이 단지 교회당을 이용해 평일엔 학교로 쓰고 주일이나 예배 시에는 예배당으로 써 왔다. 결국 해촌이 교회측으로부터 인계받은 것은 교명과 학동 뿐이었다. “새로이 교사 등을 신축하고 보니 사실상 새로 설립한 학교였다. 당시 내가 여기에 투입한 금액은 재산의 절반을 넘었다”고 해촌은 전한다.
`동해의 정어리 어업`이란 제목에서는 정어리 어업계가 가속도로 호황을 거듭하자 어군탐지의 신속 정확을 위해 비행기까지 동원된 점을 소개하고 있다.
각 정어리 어선에 무전설비를 갖게 해 공중으로부터 어군을 탐지· 발견하면 무전으로 각 어선에 통보하는 과학적 방법을 이용했다. “공중에서 무전이 오면 어선과 운반선 수백척이 일제히 앞을 다투어 그 수역으로 달려 갔다. 그 광경은 마치 해전을 방불케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이밖에도 해촌은 포항 삼일상회와 포항운수주식회사 설립 과정과 도의원 출마 배경 및 도의회에서의 활동상황 등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1926년 10월, 해촌은 포항에 있던 조선식산은행원직을 사임하고 `三日商會`라는 간판을 내 걸고 사업의 길로 들어선다. 첫 사업체 이름을 삼일상회라고 한데는 그 혼자만의 숨은 뜻이 있었다.
“삼일 민족운동의 정신을 본받는 뜻에서 붙인 것인데, 일찍이 민족의식에 눈을 떠 청년운동에 열중했던 나의 심혼을 표시한 그 상호는 다분히 의식적이고 민족적인 인상을 풍기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스스로의 뜻에 따라 이 상호를 정한 것이었다.”(회고록 `풍설시대 80년` 중에서)
해촌이 첫 회사 이름을 삼일상회라고 지은 것은 목숨의 위험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되어있지 않고서는 불가능러을 것이다. 왜냐면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총독부는 기미년 삼일독립운동의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삼일정신`이란 말만 들어도 경찰과 헌병을 동원해 온갖 핍박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책은 전한다.
해촌(1905~1985)은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지만 청장년시절 대부분을 포항에서 보냈다. 1923년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포항의 식산은행에 취직한 뒤 포항청년회 지육부장을 맡아 야학을 개설하는 등 조선인 계몽운동에 나섰다. 경북도의회 민선도의원 시절에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정책을 비판하는 등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일제로부터 포항지역 총살대상 제1호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의 회고록 `풍설시대 80년`에서 포항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이유다. 특히 주일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해 6·25전쟁 초기 서울수복작전에서 맥아더 사령부를 설득해 서울시내 문화재를 폭격으로부터 보호한 일화도 이 책은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포항의 원로인사들은 당시 포항에서 그의 비중과 역할을 자주 술회하고 있지만 요즘 세대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해촌은 1991년 재경포항향우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한 김창성(84) 고문과 새누리당 김무성(63) 대표의 선친이다.
이석수 전 경북도정무부지사는 “해촌 선생은 20대 초반부터 지역경제를 비롯해 지역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손대는 것은 포항서는 모두가 최초이다시피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지평선이 하나 둘 열렸다. 지금까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혜촌 선생을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또 교육자로, 정치인으로 높게 생각하는 것은, 선각자라는 이런 배경이 뒤에 있다. 앞으로도 포항 현대사에서는 해촌 선생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창형기자 chlee@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