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해방둥이가 벌써 나이 70이 되는 해이다. 우리 해방둥이들은 젊은 세대들이 교과서에서나 배울듯한 역사의 현장을 직접 몸으로 겪은 세대들이다. 되돌아보니 70년이라는 세월의 구비가 어제의 일처럼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부분도 있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삶의 궤적이 파란만장하다고 생각한다. 해방 되는 해 태어나 격변기를 살아온 해방둥이인 나의 삶 역시 인고의 세월이 점철되어 있는 듯하다.
나이 6살에 1950년 6·25 전쟁의 참화를 겪었다. 시골 집 앞 신작로에는 피난민 행렬이 줄을 이었고, 인민군은 우리 마을을 점령했다. 대나무 숲으로 둘러쳐진 우리 집이 인민군 임시 본부가 된 것이다. 우리 집 사랑방에는 인민군들이 꽉 들어차고,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달라는 동냥꾼들이 줄을 이었다. 우리는 철없이 전쟁의 무서움도 모르고 인민군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따라 다닌 기억이 남아 있다. 우리 철부지들은 나라가 빼앗길 상황에서도 논밭에 떨어진 탄피를 주워 모아 그것을 따먹는 놀이를 했던 것이다. 1950년대 말 `못 살겠다 갈아 보자`는 민주당 구호가 보이고, 자유당의`갈아 봤자 별수 없다`는 선거 삐라가 동네 앞에 마구 뿌려졌다.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확성기를 단 선거 운동 차량을 열심히 따라 다녔다. 종이가 귀한 시절이라 삐라 한 장이라도 더 줍고, 처음 맡아보는 휘발유 냄새가 그리도 좋았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시절 4·19의 전야인 대구의 2·28 시위를 현장에서 목도하였다. 우리는 2월 28일 일요일인데도 야당의 선거 유세일이기 때문에 강제 등교되었다. 다행히 우리는 민주당 박순천 여사의 선거 연설을 신천둔치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떨리는 하야 성명을 라디오를 통해 전해 들었다. 1961년 중학교 3년 시절, 대부분 걸어서 등교하던 시절, 우리는 도시의 아스팔트 위를 질주하는 여러 대의 탱크와 무장 군인들을 보았다. 그것이 5·16 군사 정변의 현장이었다. 포를 앞세우고 총을 든 무장한 군인들, 연신 무전을 주고받는 모습이 무서워 우리는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학교는 긴급 휴교령이 내리고 라디오에서는 국가 재건 최고위의 혁명공약이 쉴 새 없이 발표되었다. 박정희 장군의 검은 색 안경 쓴 모습이 연일 신문에 등장하였다. 얼마 후 거리에는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라는 노래가 마을마다 울려 퍼지고,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래가 우리의 귓전을 때렸다. 1979년 우리 해방둥이는 대부분 아이들을 키우는 30대 중반의 가장이 되었다. 박 대통령이 시해되는 10·26이 일어나고, 신군부 전두환 장군의 대머리가 TV에 자주 비치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재직했던 대학에서도 휴교령이 내려졌다. 전두환 국가보위 비상 대책 위원장은 대대적인 사회 정화 운동을 벌이고 제주도에서는 삼청교육이 실시되었다. 동료 교수들이 보안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돌아와서는 침묵하기 시작하였다. 개혁적이고 반정부적인 성향의 교수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재임용에 탈락되었다. 신 군부의 무시무시한 집권 과정과 횡포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셈이다. 40대 중반 1987년 노태우 후보는 당시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시국 수습으로 6·29 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학생뿐 아니라 지식인, 직장인등 넥타이 부대가 호헌 철패라는 거리 투쟁에 동참했던 결과이다. 이러한 87 민주항쟁의 승리는 10년 후 이 나라의 최초의 정당간의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은 이 나라 민주화의 또 하나의 시금석이 되었다. 앞으로도 역사의 흐름은 계속되고 역사는 또 다른 복병을 만날지 모른다. 모두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시점이다. 해방둥이의 최대의 희망은 분단의 극복에 있다. 민족 통일은 진정한 해방이요 광복의 완성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