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관한 업무를 오랫동안 담당하다 보니, 미술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반적 분야일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내가 보고 생각 하고,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이 일반인들에게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라는 착각이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 내곤 한다.
미술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란 외형적으로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묘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탄생과 함께 동굴 속 새겨진 벽화들이 주술적 의미건 예술적 가치를 지닌 의미 있는 조형적 기호건 상관없이, 인간이 최초로 몸짓으로 표현한 노래나 춤보다 미술이 앞서 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 속에서 미술은 생활 깊숙한 곳에서 늘 함께 해 왔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선사시대 조상들의 미술에 대한 DNA를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면 현대인들이 가지는 미술에 관한 지식과 안목은 탁월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진화하며 미술에 대한 능력은 퇴화했는지 이렇다 할 발전을 이어 오지 못한 건 사실이다.
필자가 아는 만큼 일반인들도 미술에 대한 지식을 알 것이라는 착각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그럴 것이 시각적 장애가 없는 현대인들이라면 눈으로 보고 쉽게 평가하기가 미술만큼 쉬운 예술분야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는 만큼, 쉽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주변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여기에서 생겨난 말인지 모른다. 누구나 자신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미술을 자신이 아는 지식과 함께 평가해 예술적 가치를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조형예술의 모순에 스스로 빠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예술은 동시대의 절대적 조형가치를 고스란히 담기도 하지만, 미래의 새로운 조형미로 평가될지 모를 요소들을 실험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시각적 자극에 의한 창의적인 사고와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현대인들은 미술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합리적 가치관의 정립을 통해 조형적 감각을 높여나가야 할 것이다.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느의 경우 20세기 초반 그가 표현했던 조형적 요소들이 당대 비평가들에 의해 혹독한 악평을 받았지만, 그의 일관된 예술 활동이 새로운 미술사조를 탄생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누구보다 미술을 사랑했던 유럽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일반인들의 미술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이 미술사와 일류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잔느는 앞으로 15년간 미술사에서 가장 기억되는 웃음거리로 남을 것이다. 이 평범한 늙은 화가를 천재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러스킨이 말한 `런던식 뻔뻔스러움` 때문이다. 세잔느는 시골에서 취미삼아 그림을 그리면서 노력은 많이 하지만 구성은 엉뚱하기 짝이 없는 둔탁한 작품을 계속해 만들어 낸다”라는 평론가 카미유 모클레르의 비평은 화가의 예술성을 자극해 창작의욕을 새롭게 고취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준 셈이 되었다. 그러한 비평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세잔느를 존경한다. 그의 작품은 무릇 위대한 창시적 예술가의 작품이 그렇듯, 이해 할 수 없는 신비를 지니고 있다. 마치 세잔느 자신이 위대한 힘의 영매가 되어 그림을 그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세잔느는 커다란 운동을 주도한 위대한 천재였다.”라는 영국의 화가이자 비평가인 로저 프라이의 글을 통해 새롭게 평가되었다.
미술은 결코 어렵거나 두려운 학문이 아니다. 시각적으로 가장 쉽게 보고 느낄 수 있는 예술분야임에도 불구하고, 미술을 공부하고 알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미술은 언제나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