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밥을 짓고 무와 당근은 채 썰었다. 불려 치댄 엿기름물에다 고춧가루와 생강도 우려냈다. 썬 재료와 뜨신 밥을 엿기름물에 섞어 설탕 간을 한 후 하루를 삭였다. 놀라워라, 어릴 때 먹던 그 향과 식감이 코와 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납작하게 썬 배와 사과를 곁들이고 볶은 땅콩까지 고명으로 얹으니 얼추 식혜 모양새가 나온다.
한데 나보기에 만족스런 첫 작품이 아들에겐 별 관심을 끌지 못한다. 먹는 시늉만으로 완곡하게 거절한다. 비주얼 면에서 안동식혜는 그리 산뜻한 편은 못 된다. 심하게 말하면 `꿀꿀이죽` 같다거나, 걸러서 표현해도 `물김치` 같다고 하는 이가 있을 정도로 식욕을 자극하는 모양새는 아니다. 접할 기회가 없었던 아들에게 부담스런 음료인 것은 당연하다. 가자미식해나 삭힌 홍어를 첫 대면할 때의 심정이 이와 같지 않을까. 하지만 일단 그 맛에 적응하게 되면 좋아지게도 된다. 그 과정을 거친 남편이 비교적 잘 먹어줘 다행이지만, 내 식욕에 겨워 한 통이나 담근 식혜 앞에서 아들 입맛을 접수하지 못한 건 못내 아쉽다.
문화란 그런 것이다. 태생과 함께 한 것이라면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나중에 경험한 문화가 껄끄러우면 일단 저어하게 된다. 거기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강요의 눈총 대신 배려의 눈길로 기다려줘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거기서 그쳐야 한다. 완벽히 타자를 이해하거나 이해시킨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후천적 문화 경험 앞에서 언제나 취향이 우선한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