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2월7일 오후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폴란드 바르샤바. 이날 폴란드를 공식 방문 중이던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은 무명용사의 묘를 참배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항거하다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리는 바르샤바게토 희생자 추념비도 함께 있었다.
한 나라의 국가 원수나 정부수반이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면 으레 하기 마련인 의전행사였기에 아무도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멀리서 지켜보던 기자들의 시야에서 갑자기 브란트의 머리가 갑자기 사라졌다. 희생자 추념비 앞에서 풀썩 주저앉더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머리를 숙인 것이다. 당시 보좌관들과 기자 등 참석자들은 피로가 누적되어 쓰러진 것이 아닌가 싶어 무척 놀랐다. 브란트는 무릎을 꿇은 채 한참동안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폴란드 침략으로 인해 희생된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는 나치 극우정권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19세의 어린나이 때부터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에 가담했던 인물이다. 서양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용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한 나라의 총리가 다른 나라에서, 그것도 추념비 앞에서 진솔하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 같은 참배는 브란트의 정치 역정에서 가장 값진 순간으로 평가됐다. 역사가들은 브란트가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은 것은 그 어떤 정치적 수사나 행동보다 세계에서 독일을 도덕적으로 복권(復權)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독일의 잘못된 역사에 대한 청산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난달 89세의 나치전범이 미국에서 체포됐다는 소식이 대표적이다. 공소시효가 없는 전범의 심각성을 철저히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독일 정부는 2016년 이후에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을 “나치 부활을 부추길 수 있다”는 이유로 별도의 법을 만들어 2016년 이후 출판과 판매를 금지키로 했다. 외국인 혐오증, 불관용, 반유대주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신호였다. 이 책의 저작권을 보유한 독일 바이에른州는 히틀러가 사망한 1945년 이후 70년이 되는 2015년까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출판을 금지한 상태였다. 단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해외출판만은 허용된다.
독일에서 독일인들과 대화를 할 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히틀러와 관련된 테마는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대화를 하다보면 꼭 그럴 수만도 없는 것이다. 히틀러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면 묘한 것을 느낄 수 있다. 전후세대인 일부 젊은이들에게서도 기성세대 못지않게 강대국에 대한 스스로의 묘한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경제적이나 정치적으로 이미 유럽의 중심국으로 솟아오르고 있는 독일 스스로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독일의 강대국 공포증이다. 심한 독일인들은 독일축구팀이 승승장구 하는 국제경기가 중계되면 채널을 돌려버릴 정도다. 물론 모든 독일인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독일축구대표팀을 두고 독일전차라고 부르는 것도 싫어할 정도다. 강대국 그리고 히틀러의 야욕이 부른 2차 대전의 참패로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던 그들의 뼈저린 역사 인식 때문이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우승팀인 독일이 금의환향한 자축행사에서 “가우초(아르헨티니 등 남미의 목동)는 이렇게 간다”며 허리를 숙여 구부정한 자세로 노래를 부르며 걷다가 허리를 곧게 펴고 걸으면서 “독일인들은 이렇게 간다”는 노래를 불러 논란이 일었다. 차별주의 조장에 대한 오해다. 선수들은 단순한 자축행사였다고 하지만, 독일 언론들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천박한 행동이라며 자국선수들을 호되게 질타했다.
독일은 잘못된 역사를 진심으로 청산하는 모범 국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수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청산의 길은 아직도 멀고 험난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