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대표는 포항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유년시절을 포항에서 보냈고, 청년시절에는 포항에서 기업을 창업했으며, 포항청년회 회원으로 7년여 활동했다. 따라서 포항은 바로 김 대표가 젊은 꿈을 키웠던 고향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다. 그는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났고, 화랑초등학교와 경남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갔지만, 포항과의 인연은 한때 `포항에서 출마`를 생각할 정도로 각별했다.
김 대표의 선친인 고 해촌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이 포항영흥초등학교를 설립하면서 김 대표는 포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또 선친의 유지에 따라 동빈동과 송도동에 있던 땅과 건물을 이웃에게 아무 조건 없이 나눠주기도 했다. 이처럼 부자(父子)는 `선행의 씨앗`을 뿌린 선근(善根)이었다. 부의 사회환원과 기부문화의 원조라 할만했다.
지난해 재보선때 그는 지인들로부터 `포항출마`를 권유받기는 했으나, 부산 영도에서 나와 가뿐히 여의도에 재입성했다. 그는 2012년 18대 대통령선거때 새누리당 선대위 총괄본부장을 맡았고, 선거 끝난후 사무실 앞에 편지 한장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는데 “이제 제 역할이 끝났으므로 당분간 서울을 떠나 좀 쉬어야겠습니다”라 했다. 그때 그가 찾은 곳이 바로 포항이었다. 죽도시장을 돌아보고 호미곶 한민족해맞이광장을 찾았으며, 지인의 집에서 머물기도 했다. 강해중 경보화석박물관 대표는 “김 대표는 늘 포항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회고했다.
김 대표는 포항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주었으면 한다. 지금 국회는 `부산 경남세`일색이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부산이고, 집권당 대표가 또한 부산이다. 그리고 국회의 유력한 실세들이 상당수 부산 경남 출신이다. 오늘날 부산이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를 보면 그 `힘의 실체`를 실감할 수 있고, `남부권 신공항의 가덕도` 입지가 그래서 유력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구 경북지역은 그 힘에 밀려온 게 사실이다. 자칫 `부산·경남 국회`가 될 것같다는 염려가 생긴다. 김 대표는 이 점을 중시해 주었으면 한다. 경북지역의 경제자유구역 착수나 포항운하 부지 매각 등에 힘을 보태주었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