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 머물 때의 일이다. 당시 필자의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으로 투루가우 칸톤주에 속한 란트슐라흐트 초등학교 다니고 있었다. 스위스 초등학교에는 학기 도중 아이들의 발달 과정과 상담, 소통 등을 겸한 수업 참관의 날이 있어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특히 그날은 담임 교사로부터 꼭 상담할 사항이 있으니 가급적 시간을 내어달라는 쪽지를 받은 터여서 궁금증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반 아이들은 모두 14명. 그 가운데 외국인 학생은 한국인과 이탈리아인이 각각 1명이었다. 담임 교사는 갓 발령을 받은 젊은 미혼여성이었다.
상담에 앞서 수업 참관이 있었다. 과목은 우리나라 식으로 설명하면 `사회` 과목인데 학생들에게 담임선생님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비교적 쉽게 소개하고 있었다. 독일·스위스·오스트리아·프랑스 등 유럽 각 나라의 지리적·사회적 정체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배려를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특정 국가의 역사적 우월감보다는 대등하고 공평한 관점에서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유럽의 역사를 균형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각 나라 사학자들이 공동으로 유럽사를 편찬하는 작업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사회 시간인데도 전쟁과 관련된 자유의견을 권유하며 전쟁과 관련한 음악도 틀어준다. 과목을 넘나드는 통합 교육이다. 한번 발표한 학생에게는 손을 들어도 기회를 주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학생에게 무엇이라도 좋으니 발표를 하라고 격려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능력과 소질을 가능한 한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교사로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소통을 곁들인 학부모와의 상담시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필자로선 쇼킹한 것이었다. 집 아이가 수업시간에 다른 학생을 배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혼자서만 발표하려고 해서 원활한 수업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소위 `관심학생`으로 분류된 것이다. 학교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지도할 터이니 집에서도 참고해 달라는 조심스런 당부였고 부모가 원한다면 사회성을 전문으로 하는 상담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의 충고했다. 우리나라 교육 분위기라면 리더십에 관한 소질이 엿보이니 칭찬해야 마땅한 터인데 초등학생을 두고 사회성 부족일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에 처음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고마운 상담이었고 유익한 소통이었다. 개개인의 자유와 인격,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성, 타인에 대한 배려의 마음 등 장차 시민사회의 일원이 될 새싹들에게 쏟는 스위스 초등학교의 인성교육은 지금도 필자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다.
담임 교사가 작사를 했다는 그 교실의 메아리가 지금도 맴돈다. 수업이 시작될 때와 마칠 때 반드시 부른다는 노래다.
“한국도 지구촌, 이탈리아도 지구촌, 스위스도 지구촌, 우리는 함께 살아갈 란트슐라흐트(해당 초등학교가 있는 동네) 2학년 어린이…”
같은 반 외국인 친구들의 국적을 지리적으로 먼 곳부터 우선 나열한 가사로 타인에 대한 배려가 고스란히 스며있다.
소통과 관심 그리고 인성교육이라는 말은 귀에 딱지가 붙을 정도로 지겹게 반복되고 있는 단어들이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GOP 총기사고 등으로 온통 사회가 어수선하기만 하다. 최전방지역의 `관심병사`와의 소통과 관리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대부분 한 자녀 가정에서 청년을 나라에 맡겨야 하는 것이 오늘날 국방의무의 현실이다. 엄격한 공동체적 규율은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기에 소통과 관심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들이다.
경제성장과 인성 및 정신의 풍요로움은 반드시 대척점에 있어야만 하는가.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라지만 타인의 안전과는 아랑곳없이 컨테이너 한 개라도 더 실어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것이 상식이어야 하는가. 돈과는 상관이 없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예의는 과연 냉소 받아야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