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웬만한 가정이나 식당, 선술집 등에서 중앙유력지와 지역신문을 동시에 2부 구독하는 것을 쉽게 접하게 된다. 중앙유력지라 해도 우리처럼 수도 서울에서만 발간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발간되고 있고 `쥐트 도이체 차이퉁`은 뮌헨에서, `베스테 도이체 차이퉁`은 에센에서, `디 벨트`지는 베를린 등에서 발행된다. 비중 있게 취급되는 기사들이 중앙의 정치와 경제, 시사 등이기에 말로만 중앙유력지라 불릴 뿐이다.
지역신문은 그야말로 그 지역만의 이슈와 소식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중앙유력지와 함께 독자들은 반드시 지역신문을 읽게 되는 것이다.
아래는 필자가 독일에 머문 90년대 말 남독일의 어느 지역신문에서 읽은 내용인데 무척 의미를 부여하는 내용이어서 간략하게 메모를 해 둔 것이다. 내용인 즉 이렇다.
“빼앗긴 자전거는 저의 아버지 것이었습니다. 당시 11살이었던 저는 놀라움과 함께 충격을 받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중략) 그러나 54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특별한 증오나 원망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약속대로 빼앗긴 자전거 한 대를 되돌려 주십사하고…”
이것은 1998년 파리 외곽에 거주하고 있던 프랑스인 졸 바도씨가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 앞으로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청원서에 가까운 간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바도씨는 아버지가 타계하자 서류를 정리하면서 빛바랜 영수증 한장을 발견했다. 압수번호 01066. 1944년 9월1일 날짜가 희미하게 찍혀져 있는 낡은 쪽지였다. 바도씨는 54년 전의 사건을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바도씨는 이웃집 농가에 들러 우유를 가져오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이행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독일군 3명으로부터 그만 자전거를 빼앗기고 말았다. 슬피 울면서 돌아온 소년의 손에는 독일군이 건네준 영수증이 쥐어져 있었는데 돌려줄 것을 믿은 아버지가 이것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연은 비시(Vichy)정권의 말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비시정권은 1940년 6월 프랑스 패전으로 남북이 분할되면서 성립된 파시스트 독재정부로서 북쪽은 독일 나찌군이 다스렸지만 남쪽은 페텡을 수반으로 비시란 도시를 중심으로 친나찌 정권인 비시정부가 들어섰던 것이다.
편지를 받은 파리주재 독일대사관에서는 바도씨에게 독일 본 주재 프랑스대사관을 통해 자전거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침묵만이 흘렀다. 그러나 바도씨는 국가와 국가가 풀어야할 문제가 따로 있고 개인과 국가가 해결해야할 문제도 따로 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자전거를 돌려달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파리주재 독일대사관은 바도씨의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당시 독일군인의 무례함을 사과드립니다. 요구하는 자전거에 대해서는 상응한 조치를 해드릴 것입니다` 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바도씨가 이 같은 편지를 주고받을 당시 독일의 외무부장관은 요슈카피셔였다. 물론 그 후 독일외무장관으로부터 바도씨가 문제의 자전거를 돌려받았는지 혹은 어떤 보상이 이뤄졌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짐작하겠지만 독일의 과거사청산은 이처럼 미미한 곳에서부터 철두철미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반해 일본은 아직도 우리 국민들에게 이런저런 상처만을 안겨주고 있다. 내년부터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국이 일본 땅 독도를 불법 점령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는다고 하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이쯤이면 일본은 진정 우리와 이웃이 될 수 없는 역사 왜곡의 길로 들어 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비록 전쟁 중에 빼앗긴 자전거 한 대였지만 반세기가 흐른 시점에도 공식 사과와 함께 이웃나라 국민의 작은 아픔마저 보듬어 준 독일의 올바른 역사인식의 진정성은 그래서 전 세계가 공감을 사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