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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해석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4-02-18 00:21 게재일 2014-02-1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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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은 그 자체로써 제 `실존`을 증거한다. 물론 그 실존하는 현상에도 `본질`은 있다. 하지만 단순히 보기만 하는 상태에서는 그것의 본질까지 꿰뚫어 볼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착각한다. 내 눈은 바르게 보고 있으며, 나아가 본질까지도 파악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향한 의심의 잣대가 관대할 때 우리는 곡해와 아집에 빠지기 쉽다.

오랜만에 바닷가 나들이를 갔다. 산보 코스에서, 잰걸음으로 걷다 보니 조금 이르게 집합지인 주차장에 도착했다. 일행들을 기다리며 친구와 비어있는 장애인용 주차장의 뒤턱에 퍼질러 앉아 이른 봄 햇살을 쬐고 있었다. 잠시 뒤 차 한 대가 후진해온다. 운전석의 아가씨는 세련된 이미지에다 도도한 분위기다. 친구랑 나는 동시에 중얼거렸다.“장애인증을 제시해보라 할까? 멀쩡하게 생겼고만 주저함도 없이 이곳에 주차하네.” 그 말을 하던 순간의 내 속내는 장애인을 위한 정의감도 뭣도 아니었다. 장애인도 아니면서(!) 하필이면 휴식 중인 우리 앞자리에 매연을 뿜어가며 주차할 게 뭐람, 하는 괘씸한 감정이 먼저였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아가씨를 본 순간 나는 얼음이 되고 말았다. 세련된 그녀는 분명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었다. 더 놀란 건 보조석에서 내려 그 아가씨를 에스코트 하는 이는 다름 아닌 건장한 훈남 청년이었다. 짧은 시간에 내가 저지른 판단의 오점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외관이 풍기는 인상과 장애가 무슨 상관이며, 건장한 청년 대신 불편한 여성 장애인이 운전대를 잡을 수도 있는 상황 -이를 테면 운전 연수 -이 있다는 걸 왜 깨치지 못했을까.

습관화된 어설픈 깜냥으로 본질을 겨냥하면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명제를 이 사소한 경험에도 적용하고 싶어진다. 모든 건 그대로 있다. 다만 내 눈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물은 내 식으로 가공된다. 내 주석에 따라 물이 되기도, 기름이 되기도 하는 게 풍경이다. 실존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허술한 눈으로 본질을 낚으려는 이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판단이라니!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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