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포항에서 개최되고 있는 몇 개의 전시회를 보기 위해 지난 주 포항을 다녀왔다. 이른 점심식사를 마치고, 지역 작가들과 함께 출발한 포항 길은 겨울여행이라 설렘도 있었지만 그동안 서로 시간내기가 힘들었던 작가들과의 짧은 만남이 이어 졌기에 기쁨은 배가 되었다.
그 날은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영남의 구상미술`, `경계와 탈경계`라는 제목으로 개막식이 있어 함께 참석한 것이다. 사실 미술관 개막행사라는 것이 늘 그렇지만 격식에 맞춰진 진행과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의 어색한 인사와 연회는 계면쩍기도 하고, 때로는 피로감을 가중시켜 주기도 한다. 개막행사 시간에 맞춰 도착한 미술관에는 낯익은 유족들과 참여작가, 그리고 포항지역 예술인들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어 당초 걱정과는 달리 편안함과 즐거움이 가미 되어 유쾌한 개막파티로 이어질 수 있었다. 미술관 개막행사는 서로 만나기 힘들었던 미술관계자들과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이를 통해 서로의 정보를 교류하며, 때로는 즉석에서 새로운 전시를 기획하기도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재미와 유익함이 함께 공존하는 시간이기에 작가들과 미술관계자들은 개막행사의 피곤함을 무릅쓰고 기꺼이 행사에 참석하게 된다.
이번 포항시립미술관에서는 서양미술 도입 1백주년에 즈음해 근대기 영남미술의 맥을 되짚어 보는 기획전시로 `영남의 구상미술`특별전을 마련했다. 서동진, 박명조, 배명학, 이인성, 김용조로 이어지는 대구·경북미술의 1세대 작가들은 바로 한국 서양미술의 1세대 화가들이기에 그들의 예술적 가치와 업적은 더욱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즈음해 처음 접하게 된 서양화는 한국적 사고와 가치관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조형적 요소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구상미술`로 대변하는 서양화는 아카데믹한 표현적 요소의 한계 속에서 다양성보다는 사물의 반복된 표현과 재현을 추구는 양식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서양미술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해 온 서구와는 달리 새로운 재료와 표현양식의 습득은 아무래도 눈에 보이는 대상을 고스란히 화폭에 담아내는 미술이 작가에게나 관람객들 모두에게 높은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 했던 작가들과는 달리 김준식, 박봉수, 김만술(조각), 손수택은 경주를 비롯해 경북에서 작품 활동을 펼쳤던 작가들로 구상미술이라는 일관된 미술양식 속에서 서양화 도입기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구·경북미술의 새로운 미술문화의 토양을 뿌리 내리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경주했던 화가들이다.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한자리에 마련된 이번 기획전은 이 같은 의미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고 있다. 전시를 위한 작품 대여와 수집이라는 보편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관련 작가들의 유품과 중요자료들로 구성된 아카이브까지 마련된 이번 전시는 영남 근대미술의 깊이만큼이나 기획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행사로 여겨진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숭고한 예술을 지켜내기 위해 가족과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했던 영남출신 근대작가들의 삶과 예술세계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한번쯤은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는 이유를 던져주고 있다. 오늘날 구상미술은 진부하고 아카데믹한 미술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시대 유물이며 사조라는 극단적 평가보다는 한국미술이 도입되고 형성되어져 가는 과정 속에서 구상미술이 가졌던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는 작업들이 새롭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속적인 영남미술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러한 작업들은 포항시립미술관이 수행해야 하는 당연한 일들이며, 이를 통해 영남미술의 중심으로 더욱 굳건하게 그 위치를 다져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