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대중탕에 가면 둥근 돌이 비치되어 있었다.(원래 있었는지 개인이 준비해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중년의 엄마들은 물에 불린 뒤꿈치의 각질을 면도칼로 도려낸 뒤 그 돌에다 대고 문질렀다. 그라인더 역할을 하는 돌 위에서 뒤꿈치를 갈고(?) 나면 일주일은 개운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각질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다음번 목욕탕에 갔을 때는 전보다 더한 강도로 뒤꿈치를 문질러야만 했다. 그렇게 악순환이 이어졌다.
젊었을 때는 그런 풍경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건강한 청춘의 뒤꿈치에는 각질이 생기지도, 골이 패지도 않았다. 해서 생업에 전력투구하는 엄마들의 고단한 땀이 모여 당신들 발을 거칠게 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노동하지 않고 가만있어도 뒤꿈치가 망가지는 나이가 되고 보니 이건 열심히 산 흔적이 아니라 단순한 노화 현상 중의 하나라는 걸 알겠다.
게을러서 방치했던 뒤꿈치에다 보습제를 바른다. 하룻밤 새 온 발바닥이 부들부들해졌다. 연화제 화장품은 각질을 없애는 원리가 아니라 그것을 부드럽게 진정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걸 알겠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점점 생기를 잃는다. 푸석해지고 거칠어진 삶의 흔적이 내 것이 아닌 건 아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없애려 하는 것보다 달래서 함께 가는 게 더 합리적이다. 도려내고 문지른다고 근본적으로 내 삶의 각질이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나 회한, 나아가 까칠함이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찾아오는 그것을 도려내고 깎아낼수록 더 두툼한 삶의 이물질이 내 안에 자리 잡게 된다. 삶의 각질은 잘라내고 갈아내야 할 쓰레기가 아니라 부드럽게 숨죽여 함께 가야할 동반자라는 것을 말랑말랑해진 뒤꿈치가 말해준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