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가 복잡하게 다변화되고 발전해가면서 일반인들도 점차 미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다. 미술은 이제 특정인들만을 위한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의 관심과 참여로 새로운 조형문화를 만들어지는 시대로 변모해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어렵고 난해한 현대미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마냥 어려워만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이게 뭐야? 이것도 미술이야? 도대체 이걸 보고 누구 아름답다고 해? 요즘 화가라는 사람들은 말이야 예술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최소한 그림 그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될 거 아냐!”
전시장에서 이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정직한 관객들이다. 어렵고 난해한 현대미술 앞에서 모든 걸 이해하고 아는 것처럼 서 있는 일반관객들보다 적어도 질문을 던져주며 현대미술을 알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일반들은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깊은 지식이 없다보니 작가가 그림 속에 숨겨놓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찾지도 못하고 전시장을 빠져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경우는 미술인도 예외는 아니다. 일반인들이 느끼는 현대미술의 난해함 만큼이나 화가들 역시 동료작가들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래서 오늘의 현대미술 즉 `동시대미술(Contemporary Art)`은 점점 수수께끼처럼 현대인들 주변을 맴돌게 된다.
이처럼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극단적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가 데미언 허스트이다. 그는 죽음을 냉정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표현해 내며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생명의 본질을 표현해 내는 작품을 통해 난해함을 넘어서서 혐오감 까지 주고 있다. 거대한 상어를 포름알데히드가 가득찬 유리 진열장 속에 매달고 모터를 연결해 움직이게 한 작품`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속의 있는 육체적 죽음의 불가능성`은 소변기를 자신의 작품이라고 하며 `샘`이라는 명제를 붙여 갤러리에 갖다 놓았던 마르셀 뒤샹이후 미술계의 최대 충격이었다.
마르셀 뒤샹은 소변기, 유리, 나무 상자와 같은 `레디메이드` 즉 기성품들을 새로운 차원의 미술로 옮겨 놓음으로써 화가의 손을 자유롭게 해방 시켜 줬다. 그가 생각하는 미술은 산업화 시대로 도래한 물질주의의 시대와 대량 생산시대의 새로운 예술개념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데미언 허스트는 `죽음`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악마의 자식`, `엽기의 예술가`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은 무관심과 냉소로 끔찍한 살육을 보여주는 작품 이면에 어떤 숭고함과 비장함이 어려 있어 죽음에 대한 경고와 성찰을 불러일으킨다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현대미술은 작가의 다양한 경험과 지식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조형세계들이다. 과거 미술은 아름다운의 표현방식이며, 결과물이라는 개념을 벗어나 현대인들에게 아름다움에 대한 충격을 어떻게 전해 주느냐에 있다고 본다. 심지어는 혐오스럽고 역겹기도 하며, 성적 욕구를 자극시키는 극단적 요소까지도 미술의 영역에 포함되고 있다. 이처럼 현대미술은 무엇을 추구하는 학문인지 의문이 갈 정도로 급속한 변화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요즘 미술에 대해 시각은 “현대인도 모르는 미술이 과연 현대미술이라고 할 수 있느냐?”라는 말들이 적잖게 나오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맞는 말이며, 올바른 지적이다. 하지만 19세기 고흐와 고갱, 모네를 비롯해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을 때 당대에서는 그 누구도 그들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1백년도 채 지나자 않아 인상주의 작품들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의 난해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현대미술이 얼마 지나지 않으면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한 조형언어로 새롭게 사랑을 받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