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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시상식 뒤풀이

등록일 2013-11-28 02:01 게재일 2013-11-2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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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문학상은 옛날에는 아주 없거나 적었는데 지금은 너무 많다 싶을 정도다. 하지만 빈익빈부익부라, 문학상에도 이 원리가 작동한다. 타는 사람은 이 상도 타고 저 상도 탄다. 차례가 안 오는 사람은 영 오지 않는다.

문학상을 타는 방법이 있다. 열심히, 잘 쓰면 된다. 최고의 가치를 가진 작품을 쓴다면 문학상이 그에게 돌아가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하다.

문제는 그 평가의 시각이라는 게 문학 같은 예술에서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잘 써도 문학상 차례가 안 오는 경우가 생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열심히는 좋은데 잘 쓰는 사람은 아주 적고 그런데도 문학상은 아주 많은 데 있다. 여기서 상을 수여하는 사람 주변에 문학인들이 우우 모여드는 현상이 발생한다. 문학계에서는 이 시상 주체 역시 독점화 되어 있어 특정한 사람들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현상은 더욱 흉하게 드러난다.

문학상 문제와 관련해서라면 나는 한국이 아메리카 대륙만큼이나 커서 누가 상을 받든 웬만해서는 비행기삯 때문에 시상식장에는 가볼 엄두가 안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요즘 우리 문학계의 시상식 풍경은 그야말로 동네 잔치다. 문학상의 계보나 상을 받는 사람의 계열이 확연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 상을 둘러싼 역학 관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모여든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이 무슨 뜻을 품고 왔는지가 말하지 않고 표정을 감추어도 드러나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한 이십년 전에는 누가 받든 잔치집 가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 먹어 볼까 하는 순진한 하객들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실없고 순진한 하객은 찾아보기 어렵고 상을 중심으로 근접 관계자들, 심사자, 수상자, 수상 대기자, 야심가, 초조한 관망파 같은 사람들이 화려하지만 무표정해 보이는 샹젤리제 밑에 서서 의식을 거행한다. 뜻 있는 사람이 보면 음, 이게 그렇군, 하고, 차가운 눈초리를 보내기 딱 알맞다.

시상식 뒤풀이장은 더욱 가관이다. 시상식에 참여한 것만으로는 눈도장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그리고 평소에는 그런 역학적 관계에 대한 고려를 충분히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에, 시상식 뒤풀이장 같은 주연이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의 장이 된다. 힘 있는 아저씨, 왕 언니 주변에 스스로 권력의 지근 거리에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런데 이 사람보다는 내가 높고, 혹은 가깝고, 저 사람보다는 낮거나 멀다는 의식을 은연중에 작동시키면서, 그러나 그것이 문학이라는 것을 빌미 삼은 이 허울 좋은 자리에서 티나게 드러나서는 안된다는 경계심까지 기술적으로 발휘하면서 자리를 차지하고 또는 양보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기술을 발휘해야 할 때가 왔다. 술을 마시는 것도, 잔을 부딪히는 것도, 찬사를 늘어놓는 것도, 누군가에 대한 소문을 험담 삼아, 마치 무의식중인 듯 늘어놓는 것도, 다 섬세한 기술이 필요한 종목들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나마 서투른 기술자들은 조심조심 연기를 하기 때문에 큰 문제 없이 그날의 행사를 치러낼 수 있지만, 그날 따라 무슨 일로 기분이 특별히 나쁘거나 좋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또 그날 따라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동기를 가지고 그 자리에서 각별한 연기를 해야 할 필요를 가진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또 무엇인가를 과시해야 할 사람도, 누군가의 눈에 들어야 할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뒤풀이의 곡예까지 다 치러내고 어떤 작가는 집으로 돌아가며 생각한다. 내년에는 내 차례야. 또 어떤 재주도 없으면서 과분하게도 문학상을 타왔고 심사까지 하게 된 작가도 생각한다. 그 놈을 죽여 놓았어야 되는데. 이쯤 되면 문학상이 적은 곳에서 살고, 차비를 비싸게 치르지 않고는 시상식에 가기 힘든 곳에 사는 게, 아닌 게 아니라 그나마 문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는 좋은 여건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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