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세상에 나타날 때 사회진화론이라고 해서 생물학적 진화론과 유사한 것 같은 사회학설이 맹위를 떨친 적이 있다.
사회가 진화해 가는데, 즉 앞으로 나아가는데 인간 종들 사이의 생존 경쟁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고 해서 생존을 위한 투쟁보다 상호 부조가 진보를 위해서도 핵심적이라고 설파했다. 하지만 많은 학설가들은 그런 것보다는 싸움과 상극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를 좋아한다. 사실, 그런 문제는 진리를 향한 성실성의 문제라기보다도 인간 타입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다. 그것이 옳기 때문에 믿는다기 보다는 그런 쪽이 마음에 들어서 믿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진실에 대한 의욕이 있겠다.
그 무렵에, 사회진화론자들은 인류를 구성하는 제 민족들을 문명한 인류니, 더 문화적인 인류니, 하등 인류에 야만한 인류니 하고 등급을 매기길 즐겼다. 그때 한국 사람들은 꽤 낮은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물론 그보다 꽤나 높았다. 영남 사람은 호남 사람보다 높다든가 낮다든가 하는 것을 외국 학자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조선 인종이라는 것 자체였다.
요즘 인터넷을 보면 댓글이 정말 무섭다고 느끼게 된다. 실명제 없다고 그렇게 해도 될까? 사람이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만드는 글이 많다.
왜 이렇게 말과 글이 각박해졌을까? 삶이 힘들어져서일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삶이 더 나빠지면 더 나쁜 일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노무현 정부 시대에 말이 험해지는 것을 보면서 그런 험악함에는 진보니 보수니, 좌니 우니, 어른이니 아이니, 하는 구분이 다 소용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은 옳고 남은 틀렸고, 나는 그런 말을 해도 되는 자격이 있고, 남은 그 말을 들어도 싸다는, 지극히 자기 본위적이고 우월적, 차별적인 사고법, 그런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격이 문제일 뿐임을 절감했었다.
지난 10년이 그러했는데, 11년째가 되어서도 사태가 나아지기는 커녕 더 나빠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은 나만의 감각일까?
20대 후반에 무슨 일로 마산에 가서 택시를 탔다 어세가 어찌나 강하게 느껴지는지 적응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영남으로는 별로 가본적이 없어서 일 것이다.
나중에 문학 일로 10여년을 해마다 한 번씩 마산에 가보니 사람들이 그렇게 예의바르고도 다정다감할 수가 없다. 그런가 하면 부드러운 줄 알았다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본래 사람은 멀다고, 낯설다고 생각하면 무서워하거나 싫어하는 법이다. 독일의 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은 낯선 것을 향한 원초적인 두려움을 가리켜 미소니즘(Misoneism)이라고 했다. 이 원초적인 감정을 조금만 지긋이 눌러두면 진짜 인간을 만나게 된다.
나는 문학이나 정치나 종교나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고 본다. 그것은 두 글자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이 허다한 문제들의 정답임은 1+1이 2인 것과 같이 쉬운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번연히 옆에 모자를 두고 먼 곳에 가 찾는다. 눈이 어둡듯이 마음이 어둡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서 문학도, 정치도, 종교도, 우리들의 말과 글도 어렵다. 그 정답을 옆에 뻔히 두고도, 나는 남보다 낫고, 남은 때려 상처를 줘도 좋다 한다. 내 마음 속 투쟁론적 진화론을 버리고 나면 세상에 이 좁은 땅에서 무슨 험한 말을 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