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올해의 노벨문학상이 캐나다의 여성 작가 엘리스 먼로에게 돌아갔다. 소식을 접하고서 비평가로 이름을 내놓은 사람이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서점에 가서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라는 책을 사서 들고 다니며 읽었다.
그녀는 단편소설 하나에 세상을 다 남아낸다고 하는 광고 문구인지 심사평인지가 있었다. 본래 나는 그런 과장법을 믿지 않게 된 지 오래여서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읽었다. 그러나, 그래도 노벨문학상인데, 하는 다른 한편에서의 기대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맨 첫 번 작품부터 세 번째 작품까지 읽고 네 번째 작품을 읽어 가다 그만 심드렁해져 버렸다. 여성 작가의 소설로서 이만하면 단편소설답게 꾸며놓았다고 평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 대목에서 이건 노벨문학상이라는 아우라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데,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해야 한다.
만약 엘리스 먼로의 단편소설 같은 것들이 노벨문학상에 값하는 것이라면 한국문학도 이제는 어엿한 세계문학의 반열에 들어섰다고 해도 별로 과장된 표현일 수 없겠다는 일종의 `반감` 같은 것이 드는 것은 왜였을까. 엘리스 먼로의 소설이 나쁜 것이 아니라 꽤 좋은 단편소설들이지만, 이 정도 수준의 단편소설을 한국문학은 어지간히도 많이 가지고 있노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나는 최인훈의 `구운몽`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로 넘어 왔고, 이게 끝나면 손창섭의 `부부`를 읽을 것이며, 그 다음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소문 요란한 책을 읽을 것이다. 과연 이 작품들 중에 어떤 소설이 내게 진정한 영감을 줄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는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과연 도스토예프스키다,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는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작가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살던 시대에 러시아는 전제적인 제정과 농노제와 저개발과 사회주의가 혼란스럽게 소용돌이치는 세계였다. 그때 러시아인들은 물질적으로 궁핍했고, 그보다 격심한 영혼의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죄와 벌`이나 `까라마조프의 형제`같은 소설은 그러한 사회상황에 대한 본격적인 작가적 반응이었다.
왜 하필 `까라마조프의 형제`를 꺼내들었는가. 물론 어떤 평론의 과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 소설에 대한 내 갈증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한국소설은 소설의 사회학의 수준에서 더 깊어지지 못하고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해 왔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느 날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니, 네 사람인가 다섯 사람이 앉아서 좌담을 하고 있다. 우리도 남들처럼 잘 살아보자고 한 그 생각은 위대한 것이었다는 이구동성이었다. 그때 나는 마침 `까라마조프의 형제`를 베갯머리에 놓고 잠들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세 사람의 인간형을 제시했다. 큰형 드미트리 까라마조프, 둘째 이반 까라마조프, 셋째 알렉세이 까라마조프가 그들이다. 무엇으로 인간을 구원할 것인가. 미학 또는 사랑인가? 세속적 삶의 개선인가? 종교적 초월인가?
우리 소설은 늘 가난을 말하고, 사회적 부조리를 말하고, 또는 여자와 남자의 갈등을 말한다. 하지만 무엇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부와 빈의 문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이분법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 그러면 당신은 먹지 않고 살 수 있단 말이냐. 먹는 문제가 해결 안 되고도 인간적인 품위를 지킬 수 있다고 보느냐. 나는 우리 소설이 이런 우문들을 물리치고 진정한 구원의 문제에 직입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