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귀의를 생각하는 마음

등록일 2013-10-17 02:01 게재일 2013-10-17 19면
스크랩버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갑자기 사위가 고요해지고 적막해지는 때가 있다. 온갖 일들로 부산하게 움직이다가도 그 모든 게 부질 없이 느껴지고 내가 지금 무엇하고 있나 하는 상념에 잠겨들 때가 있다.

지난 달까지만 해도 시월이 되면 이것 쓰고 저것도 쓰고 책도 편집하고 번역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막상 이 달이 되자 이렇게 작은 바퀴를 여러 개씩 굴려가며 잔재주 피우는데 재미 들이다가는 또 부질없이 가을 보내겠다는 후회로운 심정에 빠져들고 말았다.

온갖 일들을 젖혀 놓은 가운데 몇날 며칠 이광수의 소설`흙`만 읽었다. 그것도 왜 그렇게 진도가 안 나가는지 읽다가는 덮고 덮고 한 탓에 가방에서 구른 소설책이 때가 묻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겨우 3/1이나 읽었을까.

마지막 이틀은 단단히 맘 먹고 다른 글은 읽지도 쓰지도 않고`흙`만 읽었다. 그러자 진도가 점점 빨라져서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만나게 되었다.

`흙`은 내게는 아주 인연 깊은 책이다. 이광수 소설을 무척 좋아하셨던 어머니 이야기에 끌려 중학생 때 이 소설을 문고판으로 읽었는데 아주 재미 있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 지금도 나는 이광수 소설 중에 무엇이 좋으냐 하면`무정`과 더불어 아니 그보다 먼저`유정`과 `재생`과 `사랑`과 `단종애사`를 꼽고 그와 함께 이 `흙`을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흙`의 감상은 확실히 옛날과도, 대학원 때와도 달랐다. 흙에의 귀의라는 것,`흙`을 읽어가며 나는 귀의라는 한 단어를 떠올렸다.

예전에는 이 소설을 농촌 계몽 소설로나 읽었던 것 같다. 주인공 허숭이가 고향인 살개울에 내려가는 행위를 농촌운동 하러가는 정도로 이해했고, 그렇게 해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초점을 두고 읽었다.

그랬던 것이 이번에는 갑자기 내 머리 속에 귀의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허숭은 평안도 궁벽한 농촌 태생으로 서울에 와서 보성전문에서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고, 부잣집 딸까지 아내로 얻었다. 소설에 나타난 일제시대 당대에 이만하면 조선 천지에 몇 안 가는 행운아요, 인텔리요, 미래가 단단히 보장된 사람이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허숭은 서울에서 얻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이 대목에서 이광수는 농사 일을 하는 사람들과 흙이 접촉하는 방식을 다채롭게 표현해 놓고 있다.

그중의 하나로 허숭의 고향에서 논에 모를 내는 사람들은“물에서 오르는 진흙 냄새 섞인 김, 볏모의 향긋한 냄새, 발과 손에 닿는 흙의 보드라움, 이마로부터 흘러내려서 눈과 입으로 들어오는 찝찔한 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제 땀 냄새, 남의 땀냄새, 쉬지근한 냄새, 굵은 베옷을 새어서 살을 지지는 햇빛, 배고픔에서 오는 명치 끝의 쓰림, 오래 꾸부리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허리 아픔” 같은 것들을 생생하게 감지하며 일을 해나간다.

나는 혹시`흙`은 작가인 이광수 자신이 도시에서의 잡답한 삶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근원적인 삶의 기억을 더듬어 간 소설이 아니겠냐고 생각해 본다. 도시 세속의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욕망에서 떠나 삶의 근원, 본질, 토대 같은 것을 만나고 또 그 속에서 병든 삶의 회복을 꿈꾼 것이 바로`흙`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일을 벌이고 아무리 많은 성공을 거두어도 사람은 결국 실패자가 될 수 있다. 그 많은 획득은 가장 큰 상실을 위한 한갓 준비 과정에 지나지 않을 수가 있다.

어느덧 올해도 눈부신 봄은 아득히 멀어졌고 가을이 점점 더 깊어가고 있다. 오늘 서울의 아침은 8도, 설악산 단풍이 이제 절정에 오르리라고 한다.

글자와 숫자와 인조 영상들에 둘러싸인 삶을 되돌아보고 돌아가 의지해야 할 근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이 까페의 디지털 소음들도 사방 2m쯤은 뒤로 물러선 것 같다. 바야흐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자문해 보아야 할 때인 듯하다.

방민호칼럼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