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인생이라는 것은 100년을 넘기면 그나마 오래 살았다고 자족할 수 있을 만큼이나 짧디나 짧은 것이다.
아무리 자랑스러운 일도 100년이 다 못 가서 흔적 없이 되는 것이 많고, 그 반대로 아무리 부끄럽고 괴로운 일도 30년을 넘어가지 못하는 법이다.
그렇게 짧고 덧없는 것이 인생사인 것을 우리는 무엇을 그토록 애닯아 하며 살아들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인생은 또 얼마나 유구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을 세 개의 층위로 구분해서 의식, 전의식, 무의식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무의식은 주로 리비도, 즉 성적 욕망과 같은 근원적인 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이 이론이 현대 인문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프로이트를 생각할 때마다 그 논리의 간명하고도 투명한 체계에 놀라는 한편 이것은 또 얼마나 인간의 정신의 복잡함을 단순화 한 것이냐고 깊이 회의하게 된다.
불교의 유식철학 같은 것을 보면 인간의 마음을 여러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단순히 세 차원이 아니라 여덟 가지 차원으로까지 나누어 본다. 나는 어느 책에서 옛날에는 그보다도 훨씬 더 세분해서 보았다는 이야기도 보았으니 동양에서는 서양에서보다 인간 정신에 대해 일찍부터 더 깊은 이해를 시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팔식 가운데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을 가리켜 전5식이라고 하고 여섯번째의 의를 가리켜 제6식이라고 한다. 전5식에 해당하는 다섯 가지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시피 판단하거나 분석하거나 종합하는 능력은 갖고 있지 않다. 여섯번째에 해당하는 의가 바로 이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나`라는 존재를 이루게 된다. 우리가 통상 마음이라 지칭하는 것은 바로 이`의식`의 단계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유식철학에서는 제7식으로 말나식을, 제8식으로 아뢰야식을 설정해 두고 있다.
말라식은 설명하기가 아주 어렵지만 일단 아뢰야식과 앞의 여섯 가지 작용을 연결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정작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뢰야식이다.
아뢰야식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가능성의 바다라고 하며 마음의 가장 근원적인 밑바닥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나는 이 아뢰야식을 생각할 때 항상 바다를 떠올리곤 한다. 모든 생명은 바다로부터 왔으며 아뢰야식이란 이 바다 때로부터의 생명의 모든 기억이 수장되어 있는 기억의 창고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은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에 가깝지만 그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근본적이다.
나중에 프로이트의 제자였다가 결별한 융은 무의식이 단지 성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가 불교에서의 아뢰야식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인도나 중국에서는 근대 훨씬 이전부터 인간의 마음 세계에 대해 아주 깊이 탐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아뢰야식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라는 존재가 단순히 현재의 내가 아님을 깨닫곤 한다. 나는 나만의 내가 아니요, 나를 지금 하나의 생명체로 성립하게 한 모든 전사들의 총합이자 귀결점으로서의 나다. 이런 생각을 더 멀리 전개시켜 가다 보면 내 몸과 마음으로 나 혼자만, 길어야 한 백 년 살다 가는 하나의 개체로서의 삶이 아니라 어제에서 오늘로, 그리고 내일로 연결되는 초시간적 무한 진화과정 상의 나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이 순간도 유구한 삶을, 그 유구한 삶의 일부를 살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지금 이 현재가 아무리 여러 문제들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에만 반응하는 삶은 지양해야 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유구한 삶을 살아가는 숭고한 존재들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