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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서기의 회화

등록일 2013-10-08 02:01 게재일 2013-10-0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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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정찬 화가·경북도립대 교수

가을의 전시회를 앞두고 방학을 붓과 함께 하였다. 올 여름 작업의 주된 소재는 누드였다. 15년 전에 브라질 공화국박물관 초대로 개인전을 열며 다섯 점 가량의 누드를 그린 적이 있다. 다양한 포즈와 다양한 누드의 색채를 보여 주려 했다. 이번에 그린 누드 역시 그러한 맥락이다. 다만 좀 더 현실적 여성이 등장한다고 할까. 그리고 말도 등장시키고 여러 동물들도 같이 넣었다. 다만 당시에는 종이를 바탕으로 수묵으로 그렸는데 이번에는 켄버스에 서양화재료를 가미한 작품들이다. 뒤 돌아 보면 재료의 변화가 많았다는 것을 느낀다.

한 때 학창시절에는 갱지를 화판위에 바르고 밑그림을 철저히 완성하고 먹으로 선을 가늘게 긋고 그 위에 화선지를 팽팽하게 붙여 수묵담채를 그리는 작업을 했다. 당시 작가들은 국전 등 공모전의 작품들을 대부분 이러한 방법으로 그려 작품을 탄생시키던 시기였다. 졸업을 하자 화단의 상황은 수묵운동으로 인하여 전국이 수묵열풍으로 휩싸였다. 당시 공모전을 위한 작품의 방향은 전통의 수묵채색 인물화에서 벗어나 두꺼운 종이를 구기거나 주름을 만들고 과감하게 수묵으로 단숨에 그려나가는 속필화법에 의존하였다. 물론 천에도 그려보고 화선지에도 그려 보았다. 첫 개인전을 가지자 어느 미술 기자는 위험한 실험이라고 미술잡지에 기고를 했고 정점식선생님께서는 마네리즘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수년 후 정말 탈출구가 없는 한 자리의 작업에 머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 맥향화랑 사장님의 소개로 김태신 선생님을 만나 채색화를 본격적으로 사사 했다. “낳은 자식이야 어디가나 자식이지만 가르치는 자식은 정말 잘 보살펴야 한다” 그래서 제자로 거두기를 사양하신 선생님 곁에서 하나부터 열 가지를 배웠다. 당시 지역의 대학은 너나나나 모두 그러한 부분을 냉철히 비판했다. 그 배움은 결국 기존의 수묵기법과 재료에 채색을 가미하는 나만의 채색(?)양식을 만든 셈이었다. 그 후 그러한 방법은 민속 나무오브제나 돌맹이 등을 만나면서 바탕을 다양하게 소화하게 이르렀고 도판에 그리는 작업이나 항아리에 그리는 도자회화에도 매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대학시절 도자기 수업을 받았던 경험과 옛것을 좋아하는데서 얻은 것들이다.

2000년 중반 평론가 오세권씨와 캔버스 바탕에 채색과 아크릴 등을 사용하고 군더더기를 없애는 작업이 어떨까 하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리고 포천아시아 비엔날레의 메인전시에 당대 한국, 중국, 일본작가 14인과 함께 대작을 선보였다. 물론 이제는 누가 봐도 서양화다. 하지만 한국화도 재료의 혁명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평소 형님이라 부르며 따르던 방송국의 작가가 “형님의 그림은 `동도서기`입니다”라고 했다. 즉 정신은 동양 것이요, 기술은 서양 것이라는 얘기다.

요즘 많은 작가들이 한국화를 두고 고민이 많다. 철저한 외면을 떠나서 대중마저 주거에 맞지 않다며 한국화를 멀리한다. 물론 거기에는 화랑이나 경매회사들의 경영상 계산에 의해 외면을 당하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민화, 소위 베끼는 민화의 대중교육, 상업화가들의 난무 등도 한국화의 격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한국화를 하는 화가들의 열정적 자세와 함께 다양한 재료와 기법, 기술을 연마하여 새로운 모습의 한국화를 정착시켜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정말 어느 장르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한국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기본기를 철저히 연마하고 수묵과 채색에 대한 의문이 없는 해박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대중이 봐도 프로다운 기질과 달관의 솜씨는 필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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