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적인 이런 학습 효과(?) 때문에, 어렸을 때 내 여성관은 다분히 노예근성이 포함 되어 있었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친구집에 다녀 온 큰오빠가 그 친구 아내를 극찬했다. 라디오 진행자라는 그 아내는 얼굴도 고운데 맘씨는 더 곱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아무리 바빠도 남편 발 씻는 물을 꼭 안방까지 대령한다는 것이었다. 하룻밤 묵은 오빠 자신도 따뜻한 물대야 시중을 받았다면서 `여자가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 어린 나는 커서 물대야 바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하늘같은 큰오빠가 저토록 옹호하는 것이니 그것이 진리라고 믿었다.
요즘 세대는 `여자가`라는, 훈육을 빙자한 그 말을 듣고 자라지는 않는다. 자의식이 강해진 여자애들 스스로 그 말의 부당함에 분개할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세뇌된 우리 기성세대는 `여자가`라는 그 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모 부장판사가 법정에서`남편과 변호사가 있는데, 여자가 왜 이리 말이 많으냐`는 식의 발언을 했단다. 여성은 종속적이어야 한다는 그 시각이 불편하고 불쾌하다.
중년인 그 판사도 어렸을 때부터 `여자가`라는 말을 자주 접했음에 틀림없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고, 한 번 길들여진 의식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약자인 여성에 대한 비하의식을 간직한 사람이 약자 전반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갖추고 있을 지 의문스럽다. 법의 존재 이유는 공정함에 있지만, 그 공정함의 혜택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언제나 약자 쪽이라는 것을 그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