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쓰인 소품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히스꽃이다. 야생마 같은 캐서린과 야생초 이미지의 히스클리프를 대변해주는 꽃이기 때문이다. 음울한 구름, 매서운 바람에 이어 폭우가 쏟아지면 반쯤 미친 히스클리프와 제 멋에 겨운 캐서린은 온통 히스꽃 천지인 들판을 맨발로 쏘다녔다. 히스꽃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갖지 않았던 사춘기 시절, 내 머릿속의 히스꽃은 김유정 소설의 동백꽃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히스꽃을 검색해 본 적이 있다. 절대고독이자 광적인 카리스마를 상징하는 히스클리프란 이름도 실은 히스꽃과 관련이 깊다. `절벽에 핀 히스꽃`이란 뜻에 어울리려면 뭔가 강렬한 포스를 풍길 거라고 생각했다. 눈으로 확인해 본 히스꽃은 실망스럽게도 폭풍의 언덕이 아니라 여염집 울타리와 더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황폐한 언덕 풍광과 궁합이 맞는 꽃이란 걸 인정하게 된다. 음울한 구름과 거센 바람을 견디려면 화려하기보다는 키 낮고 소박하지만 강인한 꽃이 제격일 터였다.
히스꽃은 에밀리 브론테가 죽는 순간에도 함께 했다. 서른의 그녀가 죽어갈 때, 언니 샬롯 브론테는 구릉에서 꺾어 온 보랏빛 히스꽃을 그녀에게 건넸다. 히스꽃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뿐만 아니라 브론테에게도 어울리는 꽃이었던 셈이다. 한 번이라도 요크셔 지방의 하워스 무어를 여행하고 싶다. 바람 부는 황량한 언덕에 서면, 드넓게 펼쳐진 들판이 보이고 거기엔 온통 연보랏빛 히스꽃이 만발하겠지. 무리 진 히스꽃 덤불을 배경으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여전히 맨발인 채로 저들만의 격정을 발산하고 있을 것이다.
/김살로메(소설가)